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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겸상의 추억

by 서정의 공간 2017. 10. 28.


부산수필문예 2017/제29호



 


겸상의 추억



                                

분명 만장輓章이다. 큰집 높다란 담 안쪽으로 불긋불긋한 깃발이 단풍처럼 나부낀다. 담장 안쪽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지. 오겠다는 기별 없이 찾아온 고향 마을 앞에서 선뜻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큰집 담장만 올려다보고 섰다.


출가외인이라고 그랬는지, 살기에 급급할 거라 그랬는지 친정에서는 내게 할아버지의 부음을 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불쑥 가고 싶어 찾아간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만장으로 나를 반겼다. 작은어머니가 그랬다. “할아버지가 너를 불렀는 갑다.”라고. 

 

할아버지 생신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아궁이 불에 노릇하게 구운 도톰하게 살진 조기가 밥상에 오르는 생신이면, 할아버지와 겸상하는 나는 친척 앞에서 의기양양했다. 할아버지 밥상 맞은편에 내 밥과 국을 올리면 내 생일상이 되었다. 나와 할아버지만 독상을 받고 다른 가족은 큰 상에 빙 둘러앉았다.


길고 하얀 턱수염에 뽀얗게 맺힌 막걸리 방울을 손바닥으로 쓱 훑어 내리거나, 장죽의 대통을 화로에 통통 두드려 담뱃재를 털던 기억으로 남은 할아버지. 살아오며 만난 사람 다 견주어 봐도 그분만큼 인자한 대상은 없었다. 그 인자함이란 게 천성으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게 아니겠는지.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거나 버럭 화내는 걸 결코 본 적 없다. 천생 양반답게 점잖았으며 느리고 찬찬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이 층에서 떨어진 일이 있다. 휴대전화도 없던 때다. 마을 친구가 20리 길을 버스를 타고 가서 그 사실을 우리 집에 알렸다. 창문 청소를 하다가 떨어졌다는 친구의 말에 가족은 얼굴이 노랗게 질렸다. 내가 유리창과 같이 바닥으로 추락해 만신창이가 된 줄 알았던 게다. 척추에 금이 간 사고였으니 작은 사고는 아니었다. 읍내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던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당신이 너무 오래 살아 못 볼 걸 본다며 크게 상심하셨더라고 했다. 만 원권 지폐 속 세종대왕을 꼭 닮은 당신은, 마을회관 앞 양지쪽 벽에 기대어 잠이 든 듯 숨을 거두셨다. 회관에서 드신 인절미가 목에 걸렸더라고 했다.


결혼 후 맞은 내 첫 생일 때다. 문득 지난 생일이 돌아봐 지면서 집에서 생일 밥을 먹은 기억이 없는 거다. 딸이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할 어머니께는 무척 죄송한 말이다. 설령 할아버지와 겸상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내 생일상에 조기 한 마리 올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마음을 알게 되면 돌이켜 미안해하고 마음 아파하실 어머니지만, 나는 당시 물질의 결핍에 불평하지 않고 그러려니 여기고 받아들였다. 빈곤이 일상인 중에도 온화한 집안 환경 덕에 정신의 흔들림 없이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 중심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한 마을 앞쪽으로 광산 김씨 삼 형제가 나란히 터 잡고 살았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작은아버지 형제다. 요즘은 시간이 흐른 만큼 가족 구성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셋집이 나란히 사는 데엔 변함이 없다. 큰집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큰집을 지키던 큰어머니도 지난여름에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도 몇 해 전 먼 나라로 가시고 셋집엔 노인만 남아 적막이 고인다. 명절이나 생일이라고 한 집에 모여 밥을 먹던 때가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각 집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여전히 친척끼리 오가기는 한다. 그러나 집을 지키던 부모가 하나둘 세상에서 사라지는 현실은 구슬프기 짝이 없다.


할아버지 출상 날이다. 큰집 안방 병풍 뒤에 모셨던 할아버지를 마당으로 운구하는 시간이다. 사촌 간인 아이들도 분위기 살피며 손 모으고 둘러섰다. 문지방을 넘으며 관례로 박 바가지를 깨고 마당으로 내릴 때다. 한 남자가 속으로 삭이는 듯 깊은 흐느낌이 꺽꺽 들려온다. 울 아버지 울음이다. 그 울음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임을 처음 알려주듯 일깨운다. 아버지가 흐느끼니 나도 따라 목이 멘다.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손녀가 되는 나는, 한 다리 건넌 사이라고 애달픈 마음이 아무래도 덜했을 거다. 집안의 지축이시던 어른이, 거처하던 안방을 떠나는 날이라 집안에 흐르는 공기가 무겁다.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자 내 유년의 일부가 내게서 뭉텅 분리되어 나가는 상실감에 젖는다. 겸상의 추억마저 아득히 멀어지는 안타까움이 깃든다. 

 

할아버지 기일은 유월 유두일이다. 음력 유월 보름이면 한창 더울 시기다. 그래도 기일이 되면, 눈이 펄펄 날리는 날 큰집 마당에서 전통혼례 올리며 운 큰집 올케가 도시에서 찾아온다. 우리 집 큰며느리인 올케도 읍내에서 올라오고, 막내인 작은집 며느리도 인근 도시에서 기꺼이 방문한다. 당신은 사후 복도 어지간하신 게다. 겸상했던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내 생일이면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의식 속으로 찾아오신다. 그 인자하던 표정과 하얀 수염과 온화한 눈빛을 하고서.

딸이 결혼한 후 처음 맞은 내 생일 때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딸은 찰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여왔다. 마치 허한 내 속마음을 다 들여다본 양. 인터넷으로 요리법을 알아본 모양이다. 육아로 힘든 중에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날 찰밥과 미역국에 조기 한 마리의 조촐한 생일상은 값으로 환산되지 않는 밥상이었다. 나는 딸에게 내 생일에 대한 소회를 말한 적이 없다. 내 생일이면 유독 스스로 애틋해진다. 무의식에 잠재한, 할아버지와 함께 넘긴 생일의 추억 때문인가. 챙겨주는 이 없으면 나서서 나를 챙길 일이다. 

 

유두일 전후해 고향에 간 건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 어쩐지 부쩍 가고 싶더라니. 혹 영의 기운이 있다면 작용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슬쩍 든다. 같은 날 태어나 혈육으로 맺어지고, 이승을 하직할 때 함께했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 게다. 할아버지와 겸상했던 어린 나도 어느덧 이순으로 내닫는 중이다. 아득히 먼 옛날 깊이 새긴 인연처럼 할아버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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