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경주

2011.6.18 남산 칠불암에서

서정의 공간 2011. 6. 19. 12:08

 

 

 

2011.6.18. 토.

 

만남은 느닷없이 일어난다. 어쩌면 맞딱뜨린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약속을 하고 약속한 날짜와 약속시간에 만나는 만남보다는, 예고없이 부닥치게 되는 만남이

더 흥미롭다.

미리 준비되지 않고, 계산되지 않은 만남은 종종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되어 전혀 엉뚱한

사건을, 추억거리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날 역시 혼자 아니면 둘이 가던 경주 길에 갑작스레 동행이 생겼다. 동행이 생겼다고 하기보다는

내가 동행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전날 갑자기 이루어진 약속, 썩 친한 사이도 아닌데

공통분모 하나 있다는 것으로 아침부터 챙겨나가자니

시간이 내키지 않아 몇 번이고 취소할까 하다 전부 큰 회장 중간 회장들인 이들 사이에 피래미로

낑겨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며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나섰는데.

 

취소했더라면

경주에 새 삶터를 꾸민 분 전원 집에 들러, 멀리 경주 최씨 부잣집을 바라보며

오디화채와 앵두주스와 졸깃졸깃한 쑥절편을 먹지 못했을 것이며

 

칠불암에 이르는 산길, 여느 절과 달라 오로지 산길로산길로 오르다 만나는 칠불암까지

누구는 기왓장을 지다 나르고

누구는 절에서 필요한 음식을 갖다 나르고

우리도 우리가 먹을 거리를 손에손에 들고 땀 흘리며 숲을 지날 때 자연이 주는 쾌적한

공기와의 만남을,

 

드디어 산죽 사이 계단 굽이굽이 올라가 만난 칠불암의 천사같은 미소를 지닌 예진 스님과

그 스님이 우려주는 담백한 녹차맛과 찔레꽃 넣은 녹차,

그보다는 찬거리 소박한 절집 음식을 칠불암 방문 훤히 열고 먹을 때 찬이 없다며 장아찌 하나

더 놓아주시던 스님의 마음과

문밖으로 펼쳐진 남산의 새파란 소나무를 감상하며 밥 먹는 기쁨을

활짝 열어젖힌 한 쪽 창으로는

남산 봉화골 자연석 사방과 병풍바위에 새겨진

보물 제200호이자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칠불암 마애석불인 3존불 4면불의

살아있는 듯 오묘한 얼굴을 친견하는 감격을  하마터면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해맑은 예진 스님 보며

출가한 딸을 둔 친구생각에, 그 스님 생각에 마음 아리고

배웅하러 나온 예진 스님

툇마루에 무릎꿇고 합장하니 속이 다 무너져 내리더라만

다행히 역사 흔적 남은 터에 요사채 짓는다는 말에 독실한 불자는 부처님께 감사올리고

나도 속으로 합장하는 마음이 된다.

 

내려오는 길엔

세속의 때가 좀 씻겼는지 걷혔는지 걸음이 훨씬 가볍고 개운하다.

잠시 빌려신은 남자 등산화를 벗고 차에 올라 비운 가슴을 채울 말을 들으러 불국하로 향한다.

 

저녁엔 다시

그분의 정성 가득 담은 갈치조림에 각종 장아찌, 소우거지국을 곁들인 저녁을 먹지 못했을 것이며

안압지의 황홀한 빛잔치와 빛이 빚은 물 속 세상도 스쳐지나기만 했을 것이다.

하루 끝엔

잔잔한 여운으로 피로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