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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서정의 공간 2014. 5. 1. 21:11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1948년 완결판 '설국' 출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은 절묘했다. 주인공 시마무라를 따라 긴 터널을 벗어날 때 시야가 환해지는 기분을 안겨주는 문장. 그 눈의 고장은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눈뿐인 적요한 온천 마을이다.

기차가 에치코유자와 역을 향해 국경을 잇는 마지막 터널을 벗어날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 소설의 첫 문장과 다르지 않았다. 전혀 딴 세상처럼 우람한 산이 첩첩이 봄빛에 새하얗게 반짝였다. 이전 역을 출발했을 때만 해도 차창밖엔 한창 벚꽃이 만개하고, 들판에는 보리가 새파랗게 자라거나 때 이른 아지랑이가 보일 듯 포근했다. 한데 고장이 바뀌는 터널을 빠져나자 4월초임에도 아직 겨울이 머물고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기차를 타고 터널을 나올 때마다 경이롭게 보았을 경치가 소설 첫 문장으로 탄생했음을 알겠다.

소설 무대는 니카타현의 에치코유자와 마을이다. 작가가 외진 한촌에 불과한 유자와 온천에 머물게 된 것은, 자연 풍경 묘사에 대한 작가로서의 관심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당시의 문학, 특히 소설이 자연에서 멀어지고 자연을 표현하는데 낡고 구태의연한 단어들만 떠올린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이런 고뇌를 한 작가와 유자와 마을의 한적한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졌을 것 같다. 기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의 큰 눈이 내리고, 눈에 갇힌 채 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곳. 이런 정취가 충만해서인지 <설국>은 눈의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서정과 분위기를 발산한다.

 

이 <설국>은 단숨에 써내려 간 소설이 아니다. 생각날 때마다 이어 쓴 것을 드문드문 잡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인물 심리변화와 주변 자연 묘사에 상당 부분 치중하고 있다. 읽다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가 하고 의문에 잠기기도 한다. 다소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인물의 사소한 표정이나 말투, 몸동작에서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고, 자연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해 내는 감각적 표현과 문체의 결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림을 그리듯 묘사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라면 지나친 감상일까. 어쨌든 <설국>의 이 첫 문장만큼 여행을 부추기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