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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권태'의 의미

서정의 공간 2015. 5. 18. 22:13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중에서

 

시간마저 녹이는 권태

 

"폭 좁은 철도를 끼고 있는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 우리는 앉아 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야 온다. 기차역 일대는 삭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배낭 속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 꺼내 읽어볼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물음이나 문제에 관해 골똘히 사색에 잠겨볼 것인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기차운행 시간표를 훑어보거나 또는 이 역과- 우리는 더 이상 잘 모르는-다른 낯선 곳과의 거리가 다양하게 표시되어 있는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다 우리는 시계를 들여다 본다. 겨우 15분이 지났다. 그래서 우리는 국도쪽으로 걸어가본다.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이제는 국도변의 나무들을 세어본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처음 시계를 보았을 때보다 5분이 더 지났다. 이리저리 거니는 것도 싫증이 난 우리는 돌 위에 앉아 갖가지 형상들을 모래 위에 그려본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우리가 또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체험해보았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 이야기는 일생을 오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데 보냈던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하이데거가 제시한 권태에 관한 문제들을 그 어떤 작품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희곡이지요. 1953년 1월, 바빌론이라는 파리의 한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이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극 내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 죽이기'를 하지요.

 

 

 모든 문제는 대본도 성격도 없는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로 넘겨져 버렸습니다. 한번 무대에 오른 배우는 아무리 무대가 비었더라도, 설사 대본이 없더라도 , 그가 무대에 서 있는 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지요. 연극이 끝나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까지는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래서 '시간 죽이기'를 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보면,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시간 죽이기'이지만, 우선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요. 기다리는 동안에라도 당장 지루함을 달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겁니다.

 

 

블라디미르 : 이제 무엇을 하지?

에스트라공 : 기다리지.

블라디미르 :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야.

(침묵)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실존'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는 이러한 행위를 '기획투사'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기획투사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획투사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사진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행위이지요.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 본내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비로소 분명해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세상사람'으로 살 것인가? 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비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전락할 것인가? 현존재로서 인간은 언제나 그리고 매순간 이 갈림길, 바로 거기에 서 있지만, 세상사람으로서 우리는 그것마저도 망각한 채 매일매일 '시간 죽이기'에 몰입하여 분주하게만 살아가지요. 바로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 드러난 우리들 모두의 가엾은 모습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