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꽃섬 上花島
<여행작가>2015.7/8월호
걷고 싶은 꽃섬 上花島
-카메라도 담지 못한 꽃섬 이야기-
수백 장 찍어온 사진을 컴퓨터로 확인한 순간 아뿔싸, 실망이 컸다. 그 섬이 풍기는 풀내와 갯바람, 호젓한 풍취가 온전히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지, 자연의 오묘한 색을 무슨 수로 베낀단 말인가. 마음에, 눈에 고스란히 담았으면 된 거라 위안 삼는다. 바람이나 쐬자고 나섰던 여행에서 받은 치유효과가 작지 않았다. 널리 알려져 수선한 섬이 될까 봐 우려될 만큼. 여행의 끝은 마음을 흘리고 온 듯 아련히 여운이 남는다.
그곳은 아직 외부의 공기가 닿지 않은 여수 화정면 상화도上花島, 윗꽃섬이다.
윗꽃섬을 찾아
자가발전으로 전기를 공급받는 섬마을이 있다고 했다. 요즘 시대에도? 앞뒤 사정 재지 않고 따라나서기로 했다. 06:30에 부산을 출발하여 백야도에 도착하니 09:00쯤. 하루 세 번 운항하는 여객선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당두마을에서 배를 대절하기로 했다. 당두호는 10여 분 만에 상화도 부두에 닿는다. 옹기종기 자리한 주황, 빨간색 지붕을 한 마을이 아침 해를 받아 화사하다.
화도라는 이름의 두 섬이 배로 5분여 거리에 마주하고 있다. 위도가 높은 곳이 상화도, 더 낮은 곳이 하화도다. 복조리 모양을 한 아랫꽃섬 하화도는 기다랗게 누웠고, 소머리를 닮은 윗꽃섬 상화도는 동그랗게 엎드린 형상이다. 이웃 섬 하화도는 매스컴을 탄 이후 관광객이 부쩍 찾는다고 한다.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거나 백야도에서 카페리호를 탄 승객들 다수가 하화도에서 우르르 내린다. ‘하화도’를 목적지로 온 전세버스도 눈에 띈다.
사람 구경하려고 여행 오는 이는 없을 터. 북적이는 사람 틈에 끼이려고 섬을 찾는 것도 아닐 터. 내리는 이 없어 여객선도 지나치는 상화도는, 한적함을 선호하는 여행객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럽다. 임진왜란 때 배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고, 구절초며 진달래가 섬을 덮다시피 해서 꽃섬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 시대 때부터 김 양식을 해서 주민생활이 그럭저럭 윤택해 대부분이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옛 어른들 학력도 육지 사람보다 높았다고 한다.
전라남도가 실시한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대상지 공모 신청에 상화도도 포함돼 있다. 해서 본격적인 평가에 돌입했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평가하든, 본래 있는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도 훼손하지 않기를. 사람 위주가 아닌 자연 위주의 평가로 섬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면, 가장 토속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리.
섬에 홀리다
섬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부두에서 마을을 오른 편으로 끼고 왼쪽 바닷길로 가니 산으로 진입하는 길이 나온다. 빨간 흙길이다. 아직 길이 울퉁불퉁하고 다져지지 않았다. 풀냄새 물씬하고, 눈을 돌리면 바다다. 철쭉이 흐드러졌다. 자그마한 무인도 바위섬 장구도가 걷는 길 따라 보였다가 가렸다가 한다. 여수시에서 정자와 파고라 등을 설치해 상화도 생태탐방로를 만들었다. 수풀이 우거졌지만 나무 데크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 준다.
20여분 길을 오르니 데크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 서니 백야도가 눈앞에 있다. 바다 위에 뜬 듯 전망이 트인 이곳 나무 바닥에 퍼더앉아 놀고 싶어진다. 매연과 소음 공해에서 벗어나 하늘과 바다만 보니 무념무상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잠시 숨 돌리고 걷는 산길 발치에는 고사리가 늘렸다. 뱀을 만나 혼비백산했는데 사람 비명 소리에 뱀이 더 놀랐을 거다. 쉬어가라고 만든 파고라와 벤치 주변은 풀이 무성해 앉기가 망설여지는 게 흠이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금세 보상받았다. 정강산 정상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잘 가꾼 언덕 위에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섰는데, 거기로 오르는 계단 주변에 빨간 철쭉이 도열해 있는 게 아닌가. 그것만이 아니다. 아늑히 들어앉은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구절초와 철쭉이 정원인 듯 울타리를 둘렀다. 사면이 뻥 뚫린 데다 양지바르고 지면이 평평해 텐트 치고 놀고 싶다.
선착장 반대쪽 땅 끝 낫골파고라는 발아래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쉴 곳으로 안성맞춤이다. 이따금 돛대를 높이 올린 범선도 지나간다. 먹는 간식마다 꿀맛이다. 이곳에서 올라와 야생화군락지 미로공원을 지날 때는 토실하게 자란 쑥을 댕강댕강 자르며 걷는다. 청정지역에서 자란 쑥으로 쑥떡을 해먹고 싶어져서다. 바닷가 약수터로 내려가니 손에 잡기 좋은 크기의 동글동글한 몽돌이 널렸다. 돌평바구(평평한 바위)가 많아 미역을 말렸다는 곳이다. 그곳에 물이 졸졸 흐르는 약수터가 있고, 약수터로 물을 나르는 산샘이 있다. 예전에 마을 사람 중 큰산에서 당산제를 올릴 사람을 뽑았는데, 그 제주가 설과 대보름 사이에 이 샘에서 목욕재계하고 소심근신하며 제를 준비했다고 주민 김상모(66세) 씨가 설명한다. 섬 역사와 유래, 지명 등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는데 그의 고향 사랑이 듬뿍 묻어난다.
이제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난간이 이어진 비렁길을 걷는다. 개구리자리며 씀바귀, 엉겅퀴, 괭이밥 같은 야생초가 노랗고 빨간 꽃을 피워 오월의 싱그러움이 절정에 달한 구간이다. 바닷가나 습지에서 사는 도둑게도 자주 눈에 띈다. 찔레꽃도 만발했다. 찔레 순을 꺾어먹으며 어릴 적 추억을 되새김했다. 찔레나무에서 흔히 보는 진딧물이 이곳엔 전혀 없다. 공해 없는 자연 품에서 눈도 마음도 절로 순해진다.
자꾸 뒤돌아보다
선착장을 출발해 1전망대-휴게공원-정강산 팔각정-휴게파고라-낫끝파고라-미로공원-약수터-2전망대를 거쳐 해안을 따라 마을로 들어오기까지, 쉬엄쉬엄 한 바퀴 도는데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한 것 같다. 주변 바다엔 기름에 튀김 가루를 흩뿌린 듯 섬이 점점이 떠있다. 바로 앞 백야도, 하화도, 하화도에 바짝 붙은 장구도, 그 너머 소부도, 대부도, 상화도 옆 상계도, 낭도, 그 옆 길쭉한 사도, 중도, 장사도, 그 앞으로 추도, 하계도…. 섬의 특징 따라 이름이 붙은 다양한 섬이 다도해를 이루었다.
섬을 한 바퀴 돌고 마을로 돌아오니 주민이 정성껏 지은 점심이 기다리고 있다. 동행한 김지훈 씨의 고향이 이곳인 덕분이다. 해물매운탕이며 톳나물 무침 등 푸짐한 상차림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우고, 마을 구경나갔다가 이장 댁에 들렀다. 오징어 회며 간재미(가자미)회가 상위에 올랐는데, 아쉽게도 맛만 보았을 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탓이다.
믹널, 돌평바구, 물내진골, 비틀이굴, 솔여, 산샘 같은 지명들. 전해오는 토속지명이 그곳을 더욱 그곳답게 한다. 30여 해전 폐교한 상화분교는 마당 넓고 전망 좋은 펜션으로 거듭났다. 마을 이장도 두 채의 펜션을 최근에 지어 손님 받을 준비를 끝냈다. 현 농촌 실태처럼, 35가구쯤 되는 이곳도 연로한 주민 한둘이 집을 지키고 산다. 바람소리, 뱃소리만 스치는, 구멍가게도 없는 꽃섬에 갈 때는 필히 먹을거리를 챙겨갈 것.
두고 온 건 다 그리운 건가. 언제 또 넓적하게 뼈째 쓴 간재미회나 먹었으면 좋겠다. 카메라도 담지 못한 갯바람과 풀냄새가 코끝에 감돌고, 그곳에서 보지 못한 새벽과 해거름녘 풍경이 궁금하다. 상화도 정강산에서 보는 일몰에 가슴이 무너진다는데…. 이생진의 ‘무명도’만 뇌어지는 이 몹쓸 아쉬움….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無名島 /이생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