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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요일의 마음』③문이 잠기는 소리

서정의 공간 2016. 4. 24. 12:19

 

 

 

문이 잠기는 소리

 

 다음은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제5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이 구절은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 나오는, 우골리노가 아이들과 함께 탑에 갇혀 굶어 죽은 일을 회상하는 장면과 관련이 있다. 우골리노는 '그때 아래서 그 무서운 밤에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었지요.'라고 말한다. 「황무지」는 엘리어트가  단테의  『신곡』속 열쇠 돌아가는 소리의 무서움을 빌려 쓴 셈이다.

 

 우골리노가 들었던 마지막 소리, 열쇠가 찰칵하고 돌아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는 곧 세상과의 절연의 소리 또는 죽음의 소리였을 것이다. 그처럼 막막하고 절망적인 순간이 있을까. 단테가 만들고 엘리어트가 빌려 쓴 '열쇠 돌아가는 소리, 문 잠기는 소리'라는 짧은 구절은 두터운 감정이 깃든 어떤 상황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 독자들은 '문 잠기는 소리'를 통해서 그 상황의 두려운 감정과 만난다.

 

'문 잠기는 소리'의 두려움은 많은 사람이 체험했을 것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체험이다. 그것은 영화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가령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했던 영화 <빠삐용>에서 수도원 원장에게 속아서 두 번째 탈출에도 실패하고 세인트 조지프의 독방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쥐새끼 한 마리도 없이 태양만 작열하던 감옥 마당도 무시무시하지만 독방에 갇힌 뒤 문이 철컥하고 닫히는 소리와 멀어지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는 우골리노가 들었던 소리만큼 절망적이다.

 

 우리는 『신곡』의 독자가 되어 '문 잠기는 소리'의 두려움을 간접 체험할 수도 있고, 또 영화 <빠삐용>의 관객이 되어 절망을 간접 체험할 수도 있다. '문 잠기는 소리'의 두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신곡』이라는 문학과 <빠삐용>이라는 영화는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차원에서라면 영화가 문학을 대신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신곡』의 '문 잠기는 소리'를 간접 체험하는 것과 <빠삐용>의 두려움을 간접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영화 <빠삐용>에서는 감옥과 소리에 관한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감옥의 모양, 문의 생김새와 느낌, 감방의 밝기와 크기, 복도, 자물쇠 등등이 관객의 눈앞에 주어진다. 그런가 하면 '문 잠기는 소리'와 멀어지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도 생생하게 들린다. 그것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 관객은 그것을 보고 들으면서 수동적으로 영화 속의 세계에 몰입하면 된다. 영화가 간접 체험시켜주는 상황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관객이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그냥 넋 놓고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이에 비해 문학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정보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문 잠기는 소리'에서 우골리노가 느꼈던 무시무시한 절망감과 그 상황을 전달하기 위애서 단테는 단 몇 개의 단어들만 제시해줄 뿐이다. 독자들은 어떤 면에서 몇 개의 초석과 부러진 기둥만으로 고대 도시를 복원해낼 뿐만 아니라 그 고대 도시의 생활상까지 파악해내는 고고학자와 같다. 단 몇 개의 단어와 문맥에 의존해서 독자들은 우골리노가 처했던 상황과 그의 감정까지도 재구성해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상상력이다. 독자들은 상상력으로 작품 속의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상상력은 문학작품의 생산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하고 필수적인 구이지만, 문학각품의 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도구이다.

 

 우골리노가 들었던 '문 잠기는 소리'를 상상해서 자기 스스로 우골리노가 처했던 상황과 감정을 간접 체험해 보는 것이 독서의 과정이다. 영화의 감상에는 이 과정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영화는 어느 정도 이해된다. 그러나 문학작품은 소위 비지정영역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독자들이 스스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빈 곳을 메워 넣어야 한다. 심지어는 작중 인물이 신은 양말이나  신발까지도 상상해야 할 때가 있다. 따라서 독자들이 지닌 상상력의 수준에 따라서 독서과정에서 재구성되는 상황과 감정의 구체성, 폭, 깊이 등은 크게 달라진다. 어떤 문학작품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력의 작용을 그만큼 확대했다는 것과 상통한다.

 

 <빠삐용>에서 관객이 본 감옥과 관객이 들었던 문 잠기는 소리는 단 하나이지만, 『신곡』에서 독자들이 본 탑의 감방과 문 잠기는 소리는 독자들마다 다 다르다. 언어는 보잘것없는 기호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상상력의 도움을 받으면 세계보다 더 큰 것도 보여줄 수 있다.

 

 한 편의 짧은 시가 우주를 담고 있다는 말도 이런 뜻에서 이해된다. 그래서 나에게는『신곡』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빠삐용>의 그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영화가 문학을 대신할 수는 없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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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호 지음 『일요일의 마음』중에서

 

출처 :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글쓴이 : 김나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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