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원도심, 그 숨은 매력 속으로②흰여울마을 만나다
부산 원도심, 그 숨은 매력 속으로②
-흰여울마을 만나다
부산 영도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영도를 지켜주는 봉래산 삼신할머니가 욕심이 많아 영도로 들어오는 것만 좋아하지만, 영도에서 나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해서 함부로 영도 밖으로 이사를 나갔다가는 망한다는 속설이 그것이다. 어쩐지 흘려들을 수 없을 것 같은, 귀 솔깃해지는 이 신묘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도시 속의 섬 영도. 이 영도에서도 부산시내와 멀지않은 곳에 흰여울마을이 숨은 그림처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부산 원도심스토리투어 코스에 들어있어 관광공사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이야기할매할배’의 상세한 해설을 들으며 돌아볼 수 있다. 최근 이곳에서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한 후 먼데서도 찾아오는 이가 많다. 한국의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감천문화마을보다 더 산토리니풍인, 막힘없는 바다가 눈앞에 창창하게 펼쳐졌다. 감천문화마을이 성냥 곽 같은 집이 산자락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바다를 멀리 바라보고 있는 형태라면, 흰여울마을은 길게 이어지는 마을길을 지나는 내내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있다는 게 다르다. 태평양을 아득히 품은 이 마을에서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부산남항대교가 그림처럼 바다에 걸려있다.
이 흰여울마을엔 아린 역사가 깃들었다. 원래 이곳은 해안가의 경사면이라 사람이 주거하기에 적합한 위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해방 후 영도지역으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면서 해안가까지 주거지가 생겨났다. 그들은 ‘하꼬방(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후에는 거제도에 수용된 피난민과 실향민이 집단으로 유입되면서 마을의 모습을 갖추었다. 흰여울마을이 생겨난 유래다. 워낙 여행이 대중화된 시대라 인터넷에 오르거나 입소문이 나면 거리 불문하고 그 현장을 찾아온다. 그러나 단순히 훑고 가는 여행보다 그곳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둘러보기를 권한다.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질 것이다.
마을 해안가 산책로를 걷다 아슬아슬 축대 위에 놓인 마을을 올려다보면 아찔하다. 큰바람이나 파도가 몰아칠까 조바심마저 들게 한다. 저만치 하늘에 걸린 듯하다. 마을을 떠받친 축대가 마을운치를 망치는 성곽 같지만, 실은 이 축대가 마을을 보호하는 주춧돌이나 다름없다. 원래 수십 가구의 집과 텃밭, 돼지 축사가 있던 경사진 언덕을 사라호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고, 태풍 셀마가 또 한 번 휩쓸었다. 튼튼한 콘크리트 축대가 생겨난 까닭이다. 그러나 막상 마을 속으로 들어가 다닥다닥 붙은 집 앞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봄날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런 아련한 향수가 이곳을 다시 찾게 하는 이유가 된다.
마을을 걷는 중심축은 마을을 관통하는 흰여울길이다. 벼랑을 막은 키 낮은 담장 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걷기에도 좁은 골목길에 서면 보이는 거라곤 바다뿐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늘보다 바다의 표정을 날마다 보고 살 것 같다. 푸른 바다만 보고 사는 이곳 사람들의 순수한 심성이야 말해 무엇하리.
1950~60년대에는 뒷산인 봉래산에서 땔감을 구해왔다. 그것을 이고 지고 좁은 골목을 오갔다. 그런 시간은 이제 다 흘러갔지만 길은 사람들의 고단함과 웃음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특히 길을 따라 난 공중화장실이 그렇다. 느티나무 화장실, 음표 화장실, 하늘 화장실 등이 지금은 이름 하나씩 예쁘게 달고서 당시의 궁핍을 노래한다. 고단했던 삶의 흔적 앞에서 관광객은 사진을 찍고, 마을 사람들은 과거를 본다.
마을 앞 드넓은 바다는 심심하지 않다. 배 정박지가 있기 때문이다. 푸른 수평선 저만치로 점점이 선박이 계류 중이다.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화물선이나 원양어선, 선박 수리나 급유 차 오는 통과 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잠시 머문다. 일거리가 없어 장기 대기 중인 빈 배도 있다. 한해 끝인 12월 31일에는 이곳에서 뱃고동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이날 자정을 전후해 정박 중인 배들이 축포를 쏘고 뱃고동을 울려 해상 장관을 연출한다. 흰여울마을은 그 축포에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시끌벅적하게 맞이한다.
골목을 따라 곳곳에 볼거리가 있다. 영화 ‘변호인’, ‘범죄와의 전쟁’ 등의 촬영지도 발길을 끈다. ‘변호인’ 촬영지는 그냥 빈집으로 놔두는 게 아니라 마을 주민이 돌아가며 이곳을 지킨다. 특히 방 문틀을 액자삼아 멋진 바다배경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골목에서 옛 추억을 가장 실감나게 떠올려주는 곳은 뭐니 해도 흰여울점빵집일 것이다. 마침 방문한 날은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쪽문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이천 원 짜리 라면 맛이 기가 찼다.
금실 좋은 할매할배가 살았다는 꼬막집이며, 피란민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지은 하꼬방, 대야에 담긴 작은 텃밭이 그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좁고 불편했을 삶의 환경이 지금은 삭막해지고 무뎌가는 정서를 다독이고 위로한다.
이곳엔 바닷길과 마을을 잇는 계단이 몇 개 있다. 들머리에 있는 맏머리 계단, 중간쯤에 위치한 꼬막집 계단, 마을에 무지개가 피어나기를 소망하는 염원이 담긴 무지개 계단, 피아노 건반처럼 생긴 피아노 계단, 돌로 만들어진 도돌이 계단 등. 이들 계단은 가파르다. 마을이 그만큼 경사진 곳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무릎에 무리가 갈 것 같으면 마을을 먼저 둘러보고 계단을 따라 바닷길로 내려오면 되겠다.
아무 것도 거치지 않은 원형의 바람과 거르지 않은 원색의 태양이 그대로 내리쬐는 마을. 일출과 일몰을 다 품은 마을. 일 년 내내 편서풍이 불어 태풍도 자주 맞닥뜨리지만 이 마을은 당당히 버텨냈다. 그런 마을에서는 옛 고향 마을을 걷듯 자분자분 걸을 일이다. 하늘과 바다와 맞닿은 이 마을의 속 얘기를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