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문화』

원도심스토리투어 최종회 - 응답하라 피란수도1023

서정의 공간 2018. 1. 30. 16:41





















이바구할매,할배가 동행안내함.
부산 원도심, 그 숨은 매력 속으로
- 응답하라 피란수도1023
                                                                       



 
 부산원도심스토리투어 마지막 회다. 새로 원도심투어 목록에 오른 이번 편은 건너뛰려고 했으나 가지 않았더라면 후회로 남을 뻔했다. 얕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취재를 하는 건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다. 피란수도 1,023일간의 기록을 보았고, 공동묘지 비석 위에 지은 집도 보았으며, 인간을 주제로 숱한 기록을 남긴 한 사진가의 생애도 보았다. 

 정기투어 집결지는 공식적으로 비석문화마을 입구 산상교회 앞이다. 토, 일요일 정기투어와 시간이 맞지 않아 이바구할매의 해설 없이 나섰다. 서구의 ‘임시수도기념로’를 있게 한 임시수도기념관부터 들른다. 지하철 토성동 2번 출구 인근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정부는 같은 해 8월 18일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한다. 정부 부처와 국회 등 국가 주요 기관들이 부산으로 이전했다. 경남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이때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부산은 1,023일간 임시수도 역할을 해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이승만 대통령 관저가 있던 곳으로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했다. 이곳 도로명도 ‘임시수도기념로’다.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평일임에도 태극기가 나부낀다. 부산 시민으로서 이제야 찾은 미안함과 엄숙함으로 걸음이 조신해진다. 많은 피란민에게 애환을 안기고, 아직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부산이 아닌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들러볼 곳이 아닌가 한다.
 이곳 1층에는 대통령관저에는 응접실, 내실, 거실, 욕실 등이, 2층 전시실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과 자료, 피란민의 생활상와 전쟁기 예술활동, 임시수도 1,000일의 정치, 행정, 경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최근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 대한민국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조건부로 등재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시수도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인정받은 성과가 아닌가 싶다. 기념관 인근에 있는 석당박물관도 지하철 토성역 2번 출구에서 35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석당박물관은 부산 최초의 박물관이다. 경남도청이 전쟁 시기에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경남도청으로 돌아왔고 이후 부산지방검찰청 청사로 사용되었다. 2002년 동아대학교에서 건물을 매입하고 석당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고실, 도자실, 와전실, 불교미술실, 서화실, 민속실,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 등이 있다. 소장유물은 국보 개국원종공신녹권, 동궐도를 비롯해 보물과 지정 유형문화재 등  유물이 30,000여점 소장되어 있다. 이곳은 역사적 기억을 담는 공간인 동시에 지역문화시설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본 건물을 박물관으로 수리, 복원할 때 기존 벽체를 살리고 최소한 변경하는 작업을 했다. 지하 수장고부터 전시장 곳곳에 남아있는 벽체들은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이제 비석마을로 가는 오르막길에 든다. 60년 전만 해도 좁은 골목길이었다는 오르막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더니 투어집결지인 산상교회가 나온다. 그곳에서 비석문화마을과 하늘전망대, 최민식 갤러리가 옆옆에 있다.
최민식 갤러리는 아미문화학습관 2층에 있다. 천마산 기슭 최고로 전망 좋은 곳에 자리했다. 인간을 주제로 한 사진만 찍어온 작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앵글에 담아왔다. 그런 연유로 그의 이름을 딴 갤러리가 산기슭 비석마을에 들어섰는가 싶다. 
 갤러리에는 아픈 시대상을 담은 최민식 작가의 대표 작품들이 유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역사 속으로, 미소, 희망, 낮은 곳으로 등의 주제로 전시된 사진은 애잔함과 미소를 동시에 머금게 한다. 지게에 기대어 웃고 있는 흰옷 입은 두 여인, 빈틈없이 사람으로 들어찬 자갈치 시장, 산등성이에 빼곡히 들어앉은 1960년 부민동 판자마을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역사 속 사진 앞에서 뭉클한 위안을 받고 나온다. 그의 사진이 주는 힘은 용기며 위로였다.
 
 비석문화마을은 꽤 넓다. 주민 말에 따르면 지금 마을이 있던 자리가 전부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하필 비석마을이다. 무덤 앞에 있어야 할 비석이 마을이름에 들어간 데는 까닭이 있다. 일제강점하의 이곳은 왜관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세가 가파른 산비탈이었고 그 밑 까치고갯길 아래쪽으로 드문드문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쟁 때 몰려드는 피란민이 산으로 올라가면서 천막을 치고 임시거처로 삼았다. 묘지라고 기피할 여유가 없었다. 등을 대고 누울 공간이 절실하던 차 묘지석은 집 짓는데 요긴한 건축자재가 되었다. 집과 집을 경계 짓는 벽이 되고 기둥 역할을 했다.
 그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묘지 위에 지은 집부터 축대비석, 쉼터비석, 수돗가비석, 놀이터계단비석 등 ‘명치사십이년 묘’라는 한자가 선명한 비석글자도 확인한다.
 피란수도 부산이 떼어낼 수 없는 상징적 공간이 바로 비석문화마을이었다. 감천문화마을 바로 옆 마을인데도 사람들은 이곳을 그냥 스쳐지나간다. 원도심스토리투어를 비석마을로 마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으로 돌아 나오는데 자꾸 뒤돌아봐진다.


*기념관, 박물관은 월요일 휴관이며, 부산관광공사 홈페이지에서 토, 일요일 정기투어 신청하면
이바구할매,할배가 동행안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