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감성터치>2019.1회-유엔기념공원 홍매 보고, 참배하고
서정의 공간
2019. 2. 24. 22:00
[감성터치] 유엔기념공원 홍매 보고, 참배하고 /김나현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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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02-24 19:27:44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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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홍매 개화 소식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침 일찍부터 카메라를 챙겼다. 해가 중천으로 올라오면 제아무리 고고한 매화도 그 온전한 빛깔을 느낄 수 없는 법. 문 여는 오전 9시까지 기다려 정문을 들어섰다.
경내는 정갈하고, 묘비가 정렬돼 분위기는 숙연했다. 이른 오전이라 찾는 이도 별로 없건만 걸음을 서둘렀다. 조바심으로 목을 빼고 공원 전경을 한 바퀴 훑는데 저만치에서 빨간 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홍매 두 그루가 마른 가지에 빨간 꽃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다. 서둘러 그 나무 아래에 서니 은은한 향기세례를 받는 듯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7월 8일 갑신일 편에 ‘울 만한 곳 타령’이 나온다.
열흘을 가도 지평선만 보이는 요동벌을 만난 연암은 “한바탕 울 만한 자리로구나”라고 혼잣말한다. 천지간에 넓은 시야가 펼쳐지는데 새삼스럽게 울음이라니. 좁은 조선 땅과 비교되지 않는 광활한 장소에서, 오히려 가슴이 턱 막히는 감동이 밀려들지 않았을까 싶다. 끝물 향을 푸는 그 꽃나무 아래 선 마음이 그랬던 것 같다. 정렬된 수많은 묘비석과 풀벌레도 없는 계절을 지키는 꽃나무의 정경이 외려 애처로워 보였다.
19세, 20세, 21세…. 너무나 짧은 생을 전쟁에 바치고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청춘들이 묻혀 있다. 묵념하며 한국 전사자 쪽으로 가는 길에 그만 걸음이 멎는다. 22세 터키 군인 묘비 앞에 사진액자가 하나 기대어 있다. 스물둘의 청년 얼굴은 아닌 듯하다. 아마 청년의 아버지일 것이라 여기니 그 얼굴에서 청년의 얼굴이 잡힐 듯 그려진다. 아들을 타국에 두고 간 부정(父情)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액자 뒷면은 비에 젖어 얼룩이 졌다. 이렇게나마 아들의 외로움을 달래고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라 여기니 눈앞이 뿌예진다.
이런 눅눅한 심정을 위무하듯 때맞춰 트럼펫 소리가 공원에 울려 퍼진다. 유엔기가 하늘 높이 뻗친 게양대에 막 걸리는 중이다. 정각 10시. 키가 큰 헌병 두 명은 보는 이 아무도 없어도 성심껏 예를 갖춘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손을 모으고 섰다. 저쪽 맞은편에도 한 사람이 서서 의식에 동참하고 있다. 같은 곳을 향해 선 모두는 필시 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평화를 지키려다 전사하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유엔공원은 부산에서 추천하고 싶은 단연 첫 번째 장소다. 부산만큼 바다와 산과 강과 내가 두루 있고, 갈맷길과 원도심, 재생마을, 골목, 카페거리, 바다 일몰 등을 쉽게 볼 수 있는 도시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중 남구의 유엔공원은 어느 계절에 와도 다른 데서 받을 수 없는 경건한 기운이 감돈다. 유엔이라는 이름을 단 기념비적인 장소가 우리 부산에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한국전쟁을 역사 속 이야기로만 아는 세대가 꼭 방문했으면 하는 곳이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로 만들어졌기에 재한유엔기념묘지란 명칭이 붙었었다. 그래서 아직도 유엔묘지로 아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2001년 명칭을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변경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이버홈페이지에선 이 땅의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해 유엔기 아래에서 전사한 ‘오늘의 추모용사’에 헌화하고 추모하는 글을 남기는 공간도 있다.
최근 유엔공원과 평화공원 일원에 ‘유모차와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하겠다는 소식도 들린다.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특별한 날에만 찾는 곳이 아니라, 시민에게 한결 다가선 기념공원이 될 것 같다. 소풍처럼 와서 산만한 공원이 아니라, 말없이 걷는 중에 휴식이 되고 저절로 참배가 되는 그런 공원이 되었으면 한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