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감성터치 2020-3회-지방도 1022번 길

서정의 공간 2020. 6. 7. 10:03

[감성터치] 지방도 1022번 길 /김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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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5-24 20:00:53
  • | 본지 22면

 

 

배 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곤경에 처하고 생계에 곤란을 겪는 요즘 같은 때, 나들이하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는 것이. 그러나 등원, 등교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종일 돌보느라 운신에 제약을 받은 지도 꽤 됐다. 쾌적한 날씨에 마스크를 쓰는 갑갑함도 푸른 자연을 동경케 하는 이유일 것이다.



향수에 젖듯, 여행하며 찍은 사진 속 호시절을 들여다본다. 봄 들면 해 오던 친구와의 배낭여행, 경주 대릉원 주변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동해남부선 기차 타기, 맘 맞는 이 서넛이 어울린 소모임의 반짝 회동, 중간지점에서 만나 벌써 회포 풀었을 다른 도시 친구 모임까지…. 일상이 시들할 만하면 생기를 주던 만남이 일시에 중단된 답답함이 여행을 반추하게 한다.

찍어온 사진 목록을 보니 지난해만도 파일이 30여 개 생성됐다. 청도 경주 안동 영주 밀양 순천 전주 부안…. 운문사 석굴암 봉정사 부석사 월연정 선암사 한옥마을 내소사…. 이런 친근한 명소가 있는 먼 지역은 미루더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 드라이브 길이 있다. 양산 교동에서 창녕 남지를 잇는 1022번 길. 구간 끝까지 가보지는 않았지만 도로 번호를 눈여겨보게 한 경치 수려한 길이다.

낙동강과 나란히 달리는 경부선 철길이 언뜻언뜻 보이는 길. 물금역 지나 원동에 들어서면 대한민국 지도를 닮은 낙동강이 있는 양산 팔경 임경대가 곧 나온다. 이곳에서 시원한 전망을 담았다면,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 용화사로 가보기를 권한다. 세상을 비켜 앉은 조용한 절이 그곳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바다 가장 가까이에 앉은 절이 기장 해동용궁사라면, 물금 용화사는 강에서 가장 가까운 절일 것이다. 절과 낙동강 사이 경부선 철길로 이따금 쌩 지나가는 기차 소리에 고요한 절 공기가 잠깐 소스라친다. 마당 깊은 집처럼 낮은 곳에 자리 잡은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은,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 속 미륵당의 모티브가 됐다고 전한다. 종무소 뒤쪽으로 난 지하 통로를 지나면 강이 눈앞에 있다. 강 따라 놓인 자전거 길을 달려가는 라이더가 부러워지는 전망이 그곳에 있다. 강 건너 순매원 쪽에서는 강과 매화나무 사이로 기차가 지나는 장면도 볼거리다. 다시 길을 달려 가야진사공원에 들르면 수상스키어의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서든 불쑥 길을 벗어나 배내골 쪽으로 방향을 돌려도 좋겠다.

경부선 KTX를 타면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깜짝할 새 삼랑진역에서 물금역에 이르는 낙동강이 흐르는 풍광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 풍경화 화폭 같은 멋들어진 이 경치를 보려고 상행 때는 왼쪽 좌석을, 하행 때는 오른쪽 좌석을 예매하곤 한다. 바로 그 구간을 1022번 길이 나란히 달리니 반할밖에. 한데 아쉽게도 이 구간을 고즈넉하게 달리는 멋은 줄어들 것 같다. 꾸불꾸불 돌아가던 2차선 도로를 4차로로 확장한다는 소식이 들리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고속도로보다, 내도 지나고 산과 들 가까이로 달리는 국도를 싫어하는 이는 없을 터. 비가 내릴 때 더 좋겠다고 하다가, 추색이 완연한 가을에는 말간 겨울을 당겨 연상케 하는 길. 천태산에 접어들면 안태호에서 잠깐 내렸다가, 다시 천태호로 구불구불 산허리를 감아 오르는 길은 녹음의 철이든 단풍철이든 또 오고 싶게 한다. 오월 하순 이맘때쯤 그곳 산허리엔 수풀 냄새가 진동하겠다.

봄옷을 한번 제대로 입어 보지도 못했다. 그대로 옷장으로 들어갈 옷이 태반이다. 딱히 외출할 일도 모임도 없다. 입을 일도 없는 옷을 맞춰보며 외출할 날을 꿈꾼다. 하긴 기껏 단장하고 나서 봐야 마스크로 복면해 버리니 차려입은 기분도 나지 않을 터. 눈만 빠끔 내놓고 귀고리하고 선글라스를 한들 태가 나겠는지. 덕분에 화장에 덜 신경 써도 되는 요즘, 여성들은 편해졌다고도 한다. 어쨌든 친구와 동지들의 생존 수다가 듣고 싶은 때다.

포실하던 연둣빛 잎이 초록으로 짙어간다. 주택 담장마다 노랗고 빨간 덩굴장미가 자태를 뽐내는 계절. 이제 숨통을 좀 트는가 했는데 웬걸, 이번엔 ‘클럽발’이란다. 1022번 길이 부쩍 달리고 싶은 때다.

수필가·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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