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연재

옛것과 함께 살아가기 5. 구례 오미마을

서정의 공간 2021. 4. 9. 17:24

옛것과 함께 살아가기 5. 구례 오미마을

-타인능해他人能解 운조루에서 흑매 피는 화엄사까지

사진, 글 김나현

 

 

봄을 기다렸다. 저택 운조루도 볼 겸, 천년고찰 화엄사를 더욱 고찰답게 하는 흑매와 들매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오래된 자취를 보러 갈 때는 듬직함이 내면에 깔린다. 그곳이 품은 시간만으로도 이미 기대치가 채워지기 때문이리.

봄풀이 돋지 않은 삼월 중순이다. 운조루가 있는 오미마을에 간 때가 벌써 9년 전 일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던 중에 만난 행운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간 오미마을 앞에서 그간 흐른 시간을 실감한다. 산뜻했던 마을 간판이 낡고 색이 바랬다. 글씨마저 희미하다. 그러나 시원하게 트인 들녘의 바람은 변함없이 쾌적하다. 섬진강 바람이려니 하며 깊숙이 들이마신다. 전통 한옥 곡전재, 저택 운조루, 고택 쌍산재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오미리는 복 받은 땅임이 분명하다.

때맞춰 한 티브이방송에서 윤스테이라는 숙박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오미마을과 이웃한 상사마을 쌍산재에서다. 가는 날에 맞추어 화엄사에서는 1회 홍매화들매화 휴대폰카메라 콘테스트를 개최했다. 250여 년 전에 지은 운조루를 대면하고, 그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화엄사로 가는 길. 살얼음 아래로 돌돌 흐르는 개울물처럼 마음이 달뜬다. 사진 콘테스트에도 참여해야지. 느닷없이, 이 또한 설레는 일이다.

 

 

굴뚝을 섬돌 밑으로 내어라, 운조루 창건자 인심

 

굴뚝을 섬돌 밑으로 내어라.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쌀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는 사람에겐 밥 짓는 연기만 보여도 속상할 수 있으니.”

 

운조루 창건자 류이주 선생의 인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굴뚝은 연기를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담장보다 높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데 굴뚝을 섬돌 밑으로 내리라니. 이는 연기가 집 밖으로 나감을 신경 쓰라는 뜻이다. 운조루 안채에 섬돌보다 낮게 만든 굴뚝이 있다. 기단에 구멍을 내서 연기를 빼내는, 일명 가렛굴이라는 기단 굴뚝이다. 이는 밥 짓는 연기가 담을 넘지 않도록 한 부자의 배려다. 이 굴뚝 앞에서 운조루 창건자의 깊은 마음을 엿본다. 요즘 부자들에게도 이런 나눔 정신이 이어지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굴뚝뿐이 아니다. 운조루에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생김새를 한 뒤주가 있다. 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는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1m는 더 되는 튼튼한 통나무 뒤주는 양식이 떨어진 이들을 위한 용도였다. 양식이 없는 이가 쌀을 가져가라고 뒤주 아래쪽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특히 이 뒤주를 사랑채 헛간에다 두었다. 쌀을 퍼가는 사람이 주인과 마주치는 민망함을 겪지 않도록 했다. 동학혁명, 여순사건 같은 난리에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건 곳간 인심 덕분이었다고 전한다. 베풂을 받은 사람들이 나서서 운조루를 지켰을 법하다.

열여덟 칸 행랑채 중간쯤에 대문이 있다. 불쑥 들어서려 하자 대문 입구 평상에 앉았던 노파가 주저주저 입장료를 받는다. 같이 간 친구는 9년 전에 왔을 당시 노파 얼굴을 기억해 냈다. 운조루의 9대 종부다. 평상 위에는 직접 만든 효소와 간장, 봄나물, 버섯 같은 걸 소박하게 담아놓고 방문객에게 판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사진 찍고 훑고 가는 방문객이 성가실 만도 하다. 개인의 삶은 온전히 누리지 못할 것 같다. 종부 옆에 앉아 운조루에서 살아온 내력을 짧게라도 듣고 싶었다. 한데 돌아오는 답이 너무 짧다. 사람에 지친 듯하다. 주거지역이 개방된 전통마을에 들를 땐 걸음을 조심할 일이다.

뜰엔 용트림하듯 가지가 굽은 나무에 연분홍 꽃이 만개했다. 살구꽃이다. 운조루 편액이 붙은 큰 사랑채 마루는 삭아 이음새가 헐겁다. 더러 못도 박았다. 그런 누마루에 몇 사람이 자기네 집처럼 앉아 있다. 당장 신발을 벗고 올라가 정원 풍경을 감상하고 싶지만 생각을 접는다. 아끼는 마음에서다. 다른 관광객도 우르르 올라서는 사태가 염려된다. 안채로 가는 열린 대문을 들어서다 헉 하고 멈춰 선다. 마당 장독간에 하얀 목련꽃이 뽀얗게 피어 있지 않은가. 예전에 왔을 때는 잎만 무성해 그 나무가 목련인 줄도 몰랐다. 오래전 누군가가 심었을 목련 나무, 고만고만한 장독들, 묵은 나무집이 어울린 정경은 한국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만한 그림이 없으리만치 아늑한 동양화 화폭이다.

운조루는 유이주가 낙안 수령으로 있을 때 지었다고 전한다. 사랑채 상량문에 영조 52(1776)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00여 칸이던 집이 현재 63칸이 남았다. 운조루라는 이름조차 멋스럽다. 이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각 시구 첫 자를 땄다.

 

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돌아 나오고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운조루를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았다. 운조루 집터를 금가락지가 떨어진 모양으로 보는 것도 그 맥락에서다. 이 금환락지에 속하는 곡전재도 오미마을에 있다. 곡전재는 위용 있는 저택이 아니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아기자기하게 다듬은 정원이 아름다운 집이다. 이런 정원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마루에 앉아 비멍 때리고 싶다.

오미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중 송정-오미, 오미-방광, 오미-난동 구간의 시종점이기도 하다. 9년 전에 이 마을을 지나 섬진강 둑길을 걸어서 사성암으로 갔다. 그때 걷던 가을 길은 영화 장면처럼 각인돼 있다. 섬진강 길에는 코스모스가 한들대고, 들은 황금빛이 짙어가는 중이었다. 새빨간 칸나꽃이 피어 전국 철인삼종경기 하는 행렬을 응원했다. 그때 삼종경기에 참가한 조카가 1등을 한 내력도 있다.

안채 목련꽃 아래에 있는데 밖이 소란해진다. 버스에서 내린 무리가 운조루에 들어섰나 보다. 조용히 둘러보던 친구와 나는 눈살 접으며 그곳을 나왔다. 운조루가 주거지임을 알고 발걸음도 조심할 일이다. 베풂의 본보기로 경주엔 최 부자 집이, 구례엔 운조루가 있었다.

 

 

붉은 흑매· 흰 들매 피는 화엄성지에서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시대이던 544년에 창건했다. 봄엔 매화로 더 유명하다. 붉은 홍매와 흰 들매가 그것이다. 그중 들매는 문화재청이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인 홍매, 순천 선암사 선암매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화엄사엔 각황전·석등·사사자삼층석탑·사자탑 등 국보와 보물이 여럿 있다. 이들을 앞서며 유명세를 치르는 매화를 보러 왔다. 흑매라 불리는 홍매화다. 국보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 선 이 매화는 꽃이 하도 붉어 흑매라 불린다. 이 꽃은 보는 시간에 따라 각도에 따라 붉은 정도가 달라진다. 감성여린 사람처럼 날씨에 따라서도 색을 달리한다.

절 기와지붕 사이로 그 매화가 흐드러졌다. 높다란 나무가 통째 붉게 타는 장면은 결코 흔한 풍경이 아니다. 꽃 핀 매화나무 아래에서 스님이 합장하는 사진을 보면 당장 달려가고픈 충동에 싸일 만큼이다.

조바심이 났다. 꽃이 기다려주지 않을까 봐. 꽃이 80%는 개화했다는 정보를 알고 온 터. 우람한 각황전이 계단 위로 보인다. 그 오른쪽 사자탑 뒤로 빨간 꽃 무더기가 멀리서도 선명하다. 조선 숙종 때 각황전 중건을 기념하며 계파선사가 심었다고 전한다. 매화나무는 전각 사이에서 나무 법당인 듯 고풍스럽고 당당하다. 이 꽃을 보려고 얼마나 기다렸나. 일 년 하고도 네 시간가량 걸렸다.

선홍색보다 짙은 선홍색이랄까. 꽃을 낱개로 보게 되는 게 아니라 나무통째로 시야에 들어온다. 옹이가 지고 굽이친 나무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앉았다. 줄기가 꿈틀대며 절 지붕에 이르렀다. 매화나무가 이리 클 수도 있구나. 참으로 아득하구나. 늙은 나무가 가피 입어 힘껏 틔운 꽃눈마다 꽃이 피었다. 꽃을 보려고 기다린 만큼, 꽃을 보고 있자니 애틋하다. 오롯한 내 꽃이 아니기에. 그 꽃이 질 때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기에.

다음 날도 새벽 흑매와 회포를 풀고자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깨어 여섯 시 반에 절에 도착했다. 절은 아직 어둠 속이다. 금색 불 밝힌 나한전이 저만치로 보인다. 그 앞 새치름한 홍매가 붉은 비단옷 입은 자태 같다. , 이건 꼭 봐야할 선경이다. 새벽 매화는 낮에 보는 매화에 비견되지 않을 색이다. 짙고 붉다. 가슴 저린 색이다. 찍은 사진을 봐도 낮의 색과 밤의 색이 딴판으로 다르다. 낮의 사진에는 감흥이 시들하고 새벽 사진에는 젖은 공기를 머금어 꽃 색이 펄펄하다. 새벽 사진이 없었다면 낮의 사진으로도 만족했을 터. 어둑발이 걷히면 꽃불 켰던 매화도 기지개 켜며 편안한 복장으로 돌아설 것이다.

각황사의 우람한 낡음과 새빨간 홍매화의 대비에 취한다. 절도 나도 고요한 시간. 꽃 보는 자리를 옮기다 흑매를 찍는 포인트 자리인 각황전 뒤쪽을 보는데 아뿔싸. 카메라 삼각대에 큰 렌즈를 장착한 무리가 보이고, 몇 명이 동시에 팔을 휘젓는다. 그곳에서 어서 비키라고 훠이훠이. 그러면 그렇지. 꽃을 독차지하려 한 건 욕심이었다.

전날 들지 못한 국가보물 각황전에 들었다. 매화는 거기 잠시 두고 세 부처께 삼배를 올린다. 높은 천장을 떠받친 나무 기둥 덩치에 압도당하면서도 맘은 온통 매화에 가 있다. 한때 수십 개 암자를 두고, 삼천여 스님이 화엄 사상을 꽃피운 도량이었다는 화엄사다. 국보인 석등을 내다보다가 이내 꽃으로 시선을 돌린다. 동이 틀 때 보니 이번엔 다홍색이다. 카메라가 꽃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다.

천연기념물 들매는 절 뒤쪽 길상암에 있다. 야생매화로 수령이 400년이 넘는다. 목을 젖혀야 높이 핀 꽃을 볼 수 있다. 하늘도 매화도 눈부시다. 흑매처럼 고혹적이지는 않지만 단아하고 고상하다. 고요히 향기를 퍼뜨린다. 마치 법당에 계신 부처처럼.

화엄사엔 오래지 않은 게 없다. 절 뒤 구층암에서는 모과나무 기둥을 봐야 한다. 나무 둥치를 생긴 그대로 기둥으로 썼다. 늙은 모과나무가 있는 구층암 뒷마당은 정적에 쌓였다. 늘 그럴 것 같다. 잎도 나지 않은 모과나무에 모과가 샛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풍경이 벌써 그립다.

화엄사에서 나오는 길. 마음이 어째 허전하다. 꽃을 그리 보고도 다 못 본 탓이런가. 진정 봄이 와서 매화가 피는 게 아니라 매화가 피어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