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나무를 자른 사람
[감성터치] 나무를 자른 사람 /김나현
- 김나현 수필가
- | 입력 : 2021-10-03 20: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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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지표였던 은행나무 세 그루가 잘렸다. 곧, 가을 전령사로 골목의 황금 등대가 될 나무였다. 나무둥치만 남기고 잘린 모양은 가관이었다. 골목에 올망졸망 깃들어 사는 이들을 사철 반기고 배웅하던 나무였다. 뻗친 가지는 푸르싱싱했고 녹색 잎은 한여름 땡볕을 가려 주었다. 한데 단발령에 속절없이 당한 듯 잔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잘린 모양이라니.
가을을 기대하던 가슴이 휑하니 뚫렸다. ‘총 맞은 것처럼’이라는 가요 노랫말이 맴을 돈다. 단풍을 기다리던 아이들도 나무를 보곤 할 말을 잃었다.
댕강 잘린 나무를 보고 들어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외로운 노력으로 프로방스의 황무지가 거대한 숲으로 바뀐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나무 심는 일을 장려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 편집자에 따르면 나무도 비명을 지른다고, 식물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하고 감정을 지닌 생명체이며, 식물이 잘릴 때는 동물의 피에 해당하는 투명한 액체를 흘리고 수분이 모자랄 때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른다는 것이다.
뭉텅 잘린 둥치에서 조심조심 움이 트고, 아담한 나무 형태로 회복하기까지 몇 해가 걸릴지 아득하다. 요는 볼 때마다 나무를 터무니없이 자른 사람이, 나무야 어떻게 되든 묵과한 행정에 속 쓰림이 도진다는 거다. 전선과 가로수가 지속해서 마찰해 화재나 합선 등의 위험이 있거나, 차량 통행에 방해가 돼 그걸 핑계로 잘랐다면 해당 부분만 자르면 되었을 것이다. 이건 관리를 위한 전지가 아니라 자르는 김에 모조리 잘라버린 격이다. 생각 없이 저질러놓고서 미안하다느니 앞으로 신경 쓰겠다느니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연전에 경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주 통일전 앞 1㎞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가을이면 전국에서 이 멋진 경관을 찍으려는 사진가가 몰려들었다. 청춘남녀가, 가족 나들이로, 결혼을 앞둔 남녀가 웨딩사진을 찍으러 그곳을 찾았다. 나도 통일전 앞 은행나무를 보아야 가을을 제대로 본다며 단풍철이면 달려가던 한 사람이다. 한데 이 가로수를 관리라는 명목하에 과도한 가지치기를 해 버린 것이다. 보기 좋게 풍성하던 가지와 잎이 강제로 절단되었다. 노랗게 펼쳐지던 단풍길은 듬성듬성 가위질한 사내아이 머리처럼 황폐해졌다.
가로수 수형 관리와 병충해 방지가 목적이었단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을 찾은 이들이 씁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시민과 관광객으로부터 원성을 들은 건 물론이다. 시민은 멀쩡한 가로수를 가지치기했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했다. 무엇보다 곧 단풍이 드는 시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이곳을 찾아올 이들을 배려하지 않은 막무가내 전지였다고.
집 앞 잘린 은행나무 세 그루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부끼는 은행잎엔 시나브로 퇴색해가는 기운이 얼비쳤다. 낙엽이 날릴 때도 아니고 열매가 영글기도 전이다. 집을 나서면 마주치는 이 나무는 마치 고향 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처럼 하루도 보지 않는 날이 없다. 오가며 녹색이 짙어가고 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던 마음을 깊이 다쳤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에 사는 여자가 된 낭만도 앗아갔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멀리서도 환하게 띄어 지표가 되어주던 은행나무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로수는 ‘거리의 미관과 국민 보건 따위를 위하여 길을 따라 줄지어 심은 나무’다. 좀체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이는 팬데믹을 지나는 요즘 아닌가. 부러 단풍을 보겠다고 집을 나서는 때다. 그곳에 사는 주민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가. 이 나무를 창가에 두고 사는 주민도 불평이 없었다. 거리 미관과 나무가 하는 역할에는 관심 없이 자른 행태에 반감할 뿐이다. 가로수든 도로수든 몸통 치기로 볼썽사납게 할 게 아니다. 심지는 못할망정 자르는 수위 조절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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