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연]『연금술사』에서 『오 자히르』까지
[책과 인연]
『연금술사』에서 『오 자히르』까지
김나현
브라질의 신비주의 작가, 극작가, 연극연출가, 저널리스트, 대중가요 작사가…, 『오 자히르』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 앞에 붙는 호칭이다. 이 작가를 『연금술사』로 처음 만났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진정한 보물(자아)을 찾아가는 성장소설,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하는 책 ‘연금술사’는 그와 그의 영성을 만나는 통로가 돼주었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다. 겨울바람은 뺨 위를 흐르는 내 눈물을 얼렸고, 얼음처럼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눈물은 나를 두고 강물과 함께 흘러갔다.’ 이런 문장에 홀려 하바롭스크에서 아무르강을 굽어보며 읽은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성性에 성聖스러움이 담길 수 있는가, 그 성스러움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를 다룬 『11분』, 보르헤스의 단편 「자히르」에서 영감을 받아 구상했다는 『오 자히르』, 그가 일상에서 건져 올린 경이로운 삶의 기록인 첫 산문집 『흐르는 강물처럼』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 따르면 ‘자히르’는 이슬람 전통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18세기경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어로 자히르는 눈에 보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일단 그것과 접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 나가 결국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사물 혹은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신성神聖일 수도, 광기일 수도 있다.”
-포부르 생 페르, 『환상백과사전』, 1953년
몰입해 읽은 『오 자히르』 원제 ‘O Zahir’는 아랍어로 어떤 대상에 대한 집념, 집착, 탐닉, 미치도록 빠져드는 상태를 뜻한다. 책 전반부 위의 서문이 독자 이해를 돕는다.
파울로 코엘료 글 전반에 흐르는 영성의 기운은 코드가 잘 맞는 사람이면 홀린 듯 빠져들게 한다. 그중에서도 ‘아코모다도르’라는 용어에 심취하게 한 ‘오 자히르’는 내가 만난 인생의 책이라고 할만한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왕자』 이후로 ‘어린왕자’ 만큼 심적으로 흡인한 책이며 드물게 세 번 읽은 책이다. 책갈피마다 빼곡히 붙여둔 색깔 메모지가 여태 붙어 페이지를 열게 한다. 언제라도 해당 페이지를 쉽게 찾도록 간단한 메모도 적었다. 노예, 자유, 상상, 호의은행, 자히르, 성당, 우수, 자히르강박증, 에스티르, 고독…. 포스트잇에 적은 이들 단어는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마음을 붙들어서 흘려버릴까 봐 노트 대안으로 적어둔 것들이다.
작가는 아이디어를 일깨우고 정신의 긴장을 풀려고 ‘북부 멕시코 주술 실습서’를 뒤적이다가 놀라운 글을 발견한다. 바로 아코모다도르다.
“아코모다도르: 살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정신적 외상, 쓰디쓴 실패, 사랑에 대한 환멸 등이 그것이다. 때론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은 우연한 성공이 우리를 소심하게 만들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자기 내부의 잠재된 힘을 일깨우는 수련 중인 주술사라면 맨 먼저 ‘아코모다도르’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보고, 자신의 아코모다도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이 문장을 한동안 떠날 수 없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이후로도 아코모다도르가 머릿속에서 화두로 맴돌았다. 그 말의 의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한 상태를 뜻한다는 건 알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정신적 외상, 쓰디쓴 실패, 사랑에 대한 환멸 등을 뜻하는 것이라면 정신적 외상은 해당하겠다. 쓰디쓴 실패보다도 사랑에 대한 환멸보다도, 살아가며 심신이 피폐해질 만큼 겪기도 하는 정신적 외상이 가장 우위일 것이기에. 살아오며 맞닥뜨린 불가항력이었던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불가항력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자신을 들여다볼 때의 또 다른 무력감, 절벽이 가로막은 듯 막막한 발등 앞의 현실, 신에게 매달리는 일 외는 할 게 없던 시간, 눈물조차 여유로움에서 나온다는 걸 깨닫던 순간….
‘호의은행’이란 용어도 신선하다. 톰 울프의 소설 『허영의 모닥불』에서 발견했다는 단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성질의 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은행으로 모든 영역에서 작동한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중요한 인물이 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거라는 걸 믿는다. 하여 순수한 자의로 그 특정인 계좌에 입금하기 시작한다. 그건 돈이 아닌 인맥이다. 그 사람을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알린다. 그 대가로 내가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그는 내게 채무가 있다는 걸 안다. 그는 내가 부탁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그의 계좌에 예금할 수 있다. 물론 그 예금 또한 인맥이란 개념이다.
이는 대인 간 관계에 베푸는 친절과 호의가 일종의 투자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호의은행에 예금을 맡기듯 호의를 베풀고, 또 받아들이며 산다. 또는 인맥을 예금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한다. 호의은행이란 용어를 대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며 종종 접하는 부조에 생각이 닿았다. 누군가가 겪거나 치르는 큰일에 상부상조하는 부조도 관계에 투자하는 적금이며 사람 간에 붓는 일종의 적금이라는 해석이다.
자신이 겪는 어떤 순간이나 상황에 거대한 암벽을 맞닥뜨리듯 멈춰 서게 되는 한계를 일컫는 ‘아코모다도르’. 이를 수필 제목으로 찜한 지 오래다. 한데 진도는커녕 도무지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쩌면 영영 미완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이 말이 내포한 깊은 암시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결과다.
『연금술사』에서 『오 자히르』를 만나기까지, 작가와 영성으로 이어진 그 무엇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책으로 맺어진 인연이란 이런 게 아닐까. 곳곳에 손 흔적 묻은 ‘오 자히르’를 오랜만에 다시 열면서 또 하나의 인연이 이어질 조짐과 직면한다. 소설 속 ‘나’가, 사라진 아내를 찾기까지의 여정을 닮은 시 한 편 때문이다. 문득 오디세우스를 만나고 싶어졌다. 오디세우스의 영원한 고향 이타카에 가고 싶다.
이타카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
...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콘스탄티노스 카바피(1863~1933. 알렉산드리아 출신 그리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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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등단(2004), 여행작가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사이버지부장, 부산수필과비평 회장 역임
수필집 『다독이는 시간』 외 3권, 여행 산문집 『비가 와도 좋았어』
탐방 수필집 『뿌리 깊은 한국의 전통마을 32』
수필과비평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문정수필문학상, 정과정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