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제신문 칼럼

<감성터치> 2020, 1회- 내일 찍을 사진이 있기에

by 서정의 공간 2020. 2. 7.



[감성터치] 내일 찍을 사진이 있기에 /김나현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2-02 19:19:33
  •  |  본지 26면
   
한 사진가의 인상 깊은 말이 있다. ‘내일 찍을 사진’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묘하게 희망을 준다. 프랑스 태생 사진가 마크 리부는 높이 300m가 넘는 에펠탑을 색칠하는 ‘에펠탑의 페인트공’을 찍은 작가로 잘 알려졌다. 그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선생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고. 그때 그가 한 답이 바로 ‘내일 찍을 예정입니다’였다.

카메라를 들고 에펠탑 주변을 산책하던 작가는 어마한 높이의 에펠탑에 발을 딛고 긴장감이라고는 없이 우아한 포즈로 도색 작업을 하는 페인트공을 발견했다. 자신도 안전장치 없이 탑 위로 올라가 필름 한 롤을 다 쓸 때까지 셔터를 눌렀다. 그때 나온 사진이 ‘에펠탑의 페인트공’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작업하는 그에게도 마음에 완벽하게 든 사진은 없었나 보다. 작품을 향한 열정에 공감하는 바 크다. 가장 좋은 사진은 내일 찍을 것이라는 이 현명한 대답이야말로 창작자들에게 울림을 준다. 이 말에 수필을 대입해 보며 내일 쓸 글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곤 한다. 느긋한 마음가짐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다고 하는데도 더 발전이 없거나 향상의 기미가 없을 때를 말한다. 그의 말은 창작에서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일에 내일이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들린다.

포르투갈어로 ‘조절하다’는 뜻의 낱말의 명사형인 ‘아코모다도르’를 파울로 코엘료가 쓴 ‘오 자히르’에서 접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며 정신적 외상, 쓰디쓴 실패, 사랑에 대한 환멸 등이 그런 것인데, 이런 것들이 마음을 소심하게 만들어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운동이나 악기를 배우거나 할 때 제법 하는 정도까지는 되지만, 번번이 더는 실력이 늘지 않고 멈춰버렸을 때도 이 용어가 들어맞겠다.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는 한계라는 말에서 문득 관계 파기라는 말을 떠올린다. 평생 함께하지 못하고 갈라서는 부부, 오랜 시간 다져온 우정에 금이 가는 경우, 명을 다하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는 경우, 적금이나 예금을 만기가 되기 전에 해약하거나 금전 손해까지 보며 보험을 해약하는 일 등이 일종의 관계 파기가 아닐까.

지난해 어느 시기에 은행 창구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예금이나 적금을 새로 가입하려는 목적으로 직원과 마주했더라면 기분은 가벼웠을 것이다. 이런저런 욕구를 자제하고 미루며 넣어두었던 예금을 깨러 갔으니 기분이 유쾌할 리 없었다. 물론 예금을 담보로 한 담보대출도 있고, 이자도 있는 둥 마는 둥 해 크게 손해날 일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어떤 투자전문가는 은행에 돈을 두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말한다. 예금이자가 물가 인상 폭을 따르지 못하니 마이너스나 마찬가지라는 거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소심한 소시민에겐 은행만큼 안전한 곳이 없고 든든한 금고도 없기에 별 고민 없이 푼돈을 맡겨둔다.

그런데도 표정이 어두웠던 건 만기를 채우지 못하고 해지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돈의 용도가 희망적인 일에 쓰기 위함이었지만 중도에 해지하는 심정을 오랜만에 겪어 더 그랬던 것 같다.

애써 부어오거나 유지해 온 예금을 어쩔 수 없이 깨야 하는 이런 상황이 바로 아코모다도르의 순간이 아닐까. 중도에 해지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막다른 한계. 이는 은행과 나 사이의 관계 파기이기도 하고 든든하게 받쳐주던 심적 지주의 허물어짐도 되기에 씁쓸했지 싶다.

그렇다고 계속 우울해할 일도 못 된다. 은행과의 관계는 다시 생성될 것이고, 나는 내일 찍을 사진에 꿈을 두고 또 분발할 것이기에 그렇다.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이라는 적금도 꾸준히 부을 참이며, ‘오 자히르’에서 작가가 말한 것처럼 인맥이라는 예금을 호의 은행에 넣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며 어떤 한계에 부닥치기도 하겠지만, 내일 찍을 사진이 있기에 꿋꿋하게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우리 모두 그랬으면 좋겠다.

수필가·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