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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34

[감성터치] 햇살도 갈무리하는 때 [감성터치] 햇살도 갈무리하는 때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 입력 : 2023-12-03 18:53:47 | 본지 22면 무싯날 장에 가듯 옥상으로 간다. 밤새 널어둔 무말랭이 안부를 살피고 뒤적여 주려 함이다. 탁 트인 하늘에서 내리쬐는 볕살은 순도가 높다. 구름 사이로 내리꽂히는 빛내림처럼 화사하다. 가끔, 이웃집 이불이 널리는 여름과 달리 빨랫줄이 한가하다. 볕에 색이 바랜 빨래집게만 듬성하게 걸려 여유롭다. 해넘이께 같은 이즈음 햇살은 유독 아깝다. 간당간당하게 남은 올해 시간 같다. 옥상에 서면 어김없이 고향 마당에서 하늘을 우러르는 기분이다. 빈 빨랫줄만 봐도 유년 속 풍경이 단숨에 달려나온다. 비바람에 몸통이 다 삭은 바지랑대에 줄을 의지하고 부모의 일복을 말리던, 지.. 2023. 12. 5.
[감성터치] 천년을 꿈꾸는 마애불 [감성터치] 천년을 꿈꾸는 마애불 입력 : 2023-07-09 19:51:12 | 본지 22면 뻐꾹 소리 낭랑한 산자락에 독경 소리 흐른다. 적요하던 절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가풀막진 산길을 숨차게 올라 다다랐을 때 들리는 기척이 반갑다. 보광전 앞에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하다. 스님은 보이지 않고 엎드린 보살 등만 보인다. 실은, 법당에 모신 부처보다도 어마어마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마애불을 보러 왔다. 여남은 해 전쯤, 나를 보고 환히 웃던 마애불 꿈을 꾸고 문학상을 받은 적 있다. 이후로 마애불을 보면 가까이 다가가 표정을 살피곤 한다. 마애불 29위가 굽어보는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관세음보살과 미륵존불을 정면에 두고 여자 두셋이 정좌했다. 단 아래에는 나이 지긋한 여자가 독경 따라 조그만 크기.. 2023. 7. 10.
[감성터치] 나무로 기억하는 법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 입력 : 2023-04-30 20:14:17 | 본지 22면 바야흐로 나무의 계절이다. 신록의 싱그러움이 초록 물이 배어날 듯 팽배하다. 나무에 갖는 애착도 연륜 따라 깊어지는 건지, 이즈음엔 유독 나무가 눈에 띈다. 어떤 장소와 연관되는 매개물이 있다. 이를테면 고목이 대표적이다. 그곳을 들먹이면 우람하고 당찬 고목이 연상된다. 그 자체로 유적이 되고 역사가 되는 나무로 하여 그곳이 한결 그곳다워진다. 조선 숙종 때 화엄사 각황전을 중건하며 심은 홍매나무, 보리수 염주가 유명한 지리산 천은사의 보리수나무, 남사예담촌 이씨고가 부부회화나무, 하회마을 삼신당 느티나무, 구름도 쉬어가는 지리산 와운마을 부부 천년송, 세상 길흉을 소리로 예고한 거창신씨의 황산마을 느티나무…. 수령이.. 2023. 5. 2.
[감성터치] 관조하는 즐거움 [감성터치] 관조하는 즐거움 국제신문 | 입력 : 2022-12-04 19:37:35 | 본지 22면 대구 계산성당 옆 커피명가는 창밖 경치로 명가였다. 전면을 채운 창 앞으로 색색깔 의자가 놓였지만, 조망을 위해 그 자리는 비워둔다. 가을 해가 환하게 들이치는 창으로 성당 마당 곱게 물든 벚나무 네 그루가 풍경화로 안긴다. 간혹 신자들이 오가고, 해는 시시로 창 안팎 조명을 바꾼다. 혼배성사를 마친 신혼부부가 풍경화 화폭으로 들어서자 빛을 발하던 단풍도 들러리가 된다. 행복은 최고의 ‘좋음’ 상태라던가. 소크라테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좋음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최고의 좋음이란 게 더 바랄 것 없는 내적 외적 상태를 이름이 아닐는지. 심적 욕구를 채웠을 때, 가장 안전하고.. 2022. 12. 5.
[감성터치] 타인의 고통 [감성터치] 타인의 고통 국제신문 | 입력 : 2022-09-25 19:11:23 | 본지 22면 글자 크기 라’. 부지깽이도 일손을 거든다는 농번기였다. 어머니는 아궁이 솥에 쌀을 안치고 ‘불 때다가 솥에서 따닥따닥 소리가 나면 불을 끄면 된다’고 당부하고 들에 나갔다. 밥하는 불을 끄는 시기를 가늠하기란 어린 인생 최대 난제였다. 하마 소리가 들릴까 온 신경을 쏟는데 불길한 냄새가 얼핏 코를 스쳤다. 그 냄새가 부엌 벽 틈새로 새어 나가 뒷집 담을 넘었나 보다. 뒷집 친구 영옥이 올케의, 밥 탄다고 불을 끄라고 하는 외침을 듣고서야 놀라 불을 껐다. 해가 긴 여름, 어둑발이 내려서야 퀭한 모습으로 들어선 어머니는 두리반부터 폈다. 땀에 전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어 보였다. 밥을 태운 죄가 있으니 아.. 2022. 9. 26.
[감성터치] 신록의 지리산 삼사 抄錄(초록) [감성터치] 신록의 지리산 삼사 抄錄(초록) 국제신문 | 입력 : 2022-07-10 19:48:23 | 본지 22면 계단 위로 보제루 뒤쪽 문이 활짝 열렸다. 겨울에 굳게 닫혔던 문마다 사진 액자처럼 한두 얼굴 내밀고 앉아 있다. 대웅전을 마주한 앞쪽으로도 띄엄띄엄 앉은 이들이 무료해 보이는 여름 한낮. 숨도 돌릴 겸 그늘 반 평 차지하고 앉았다. 저만치로 각황전과 화엄사 명물 매화나무가 보이는, 그리던 풍경 속에 들어온 유월 어느 날이다. 금당선원을 둔 쌍계사, 국보 각황전 천장을 받친 기둥이 웅장한 화엄사, 보리수 노거수에다 지리산 노고단 가는 길이 이어지는 천은사 순례길에 들었다. 세 절은 지리산 삼사에 천년 고찰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천지의 신이 사람 감시를 중단하고 잠시 휴식한다는, 윤달 기.. 2022.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