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서, <면앙정에 올라서서>에서
임제와 황진이
사람의 생애는 얼마나 길까. 인생은 짧고 역사는 영원하다. 하물며 같은 시대, 한 고장에 산 사람들의 모습에는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담양 정자 문화권 사람들 속에서도 범위를 더 좁혀, 면앙정 송순이 87세에 희방연을 열었을 때 가마에 송순을 태운 네 명의 제자를 다시 살펴보자. 한 테두리에 드는 이 적은 수의 사람들도 각기 성격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다.
네 명의 제자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이는 백호 임제다. 그는 전라도 나주 사람으로 1577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 정랑의 벼슬에 들어섰다. 그의 가문은 원래 무인 집안이다. 아버지 임진이 5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아버지가 제주 목사로 가 있던 때에 임제가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바다 건너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려 했다. 마침 폭풍이 심한 날이므로 배가 뜨지 못한다고 했다. 임제가 괜찮다며 강청해 배를 타게 되었다. 함께 탄 사람들이 모두 멀미를 해 쓰러졌는데, 임제 혼자만 버티고 앉아 시를 썼다. 그때 임제의 괴나리봇짐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으로부터 받은 어사화, 그리고 거문고와 칼 한 자루였다.
문인이 칼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만큼 그의 성격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이것은 그가 무인 기질을 가졌다는 뜻도 된다. 과연 뒤에 그는 북도 병마사라는 직위를 갖기도 한다.
다시 평안도 도사가 되어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에 임제는 개성을 지나게 되었다. 한때 송순이 개성 유소로 가 있을 때 임제가 찾아가 박연폭포에서 함께 풍류를 즐긴 일도 있었다. 동석한 이 중에는 스님들도 있었다. 임제와 송순은 스님들은 사귀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평안도 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개성에 다시 들른 임제는 풍류남아의 기질을 보였다. 당시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을 한 잔 부어놓고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청구연언>과 <해동가요>에 실려 국문학사에 남는 작품이다.
임제는 이른바 방외인으로 관계나 지식인들로부터 소외당하며 풍류 가객처럼 살았다. 그의 심중에는 당쟁으로 병든 세태에 대한 개탄이 있었다. 그리하여 오히려 여기저기 산간 절을 찾아다녔다. 끝내 그는 건강도 잃고 서른아홉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난다. 스승 송순보다 다섯 해를 앞서 간 생애였다.
희방연 자리 제자 중 가장 진지하게 산 인물은 고봉 기대승이다. 전라도 광주 송현동에서 태어난 그는 1554년 동당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1558년에 서른 두살의 기대승은 서울에서 스물여섯 연상인 퇴계 이황을 만났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퇴계에게 철학적 질문을 내용으로 하는 첫 편지를 썼다.
퇴계는 기대승에게 답장을 썼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의 왕래는 12년동안 계속되었고, 그중 8년은 유가에서 보는 인생의 원리에 대해 대화와 토론을 이어나갔다. 경상도 안동에서 전라도 담양까지, 또는 그 시골에서 서울까지 편지를 나른 사람은 그 두 집의 하인이었다.
이 편지의 논리를 다루느라고 이황과 기대승은 8년 동안 머릿속이 한가할 날이 없었다. 그 편지 내용은
<사단칠정분이기왕복서>2권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책&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츠비가 위대한 까닭은 (0) | 2015.05.18 |
---|---|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0) | 2015.05.18 |
최인훈의 <광장> : 유토피아에 대하여 (0) | 2015.05.18 |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권태'의 의미 (0) | 2015.05.18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만남'의 의미 (0) | 2015.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