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과 마음의 풍경3

[스크랩] 시에는 색깔이 있다 / 유득공

by 서정의 공간 2016. 2. 21.

 

 

 

시에는 색깔이 있다 / 유득공

원제 : 湖山吟稿序(호산음고서)

 

 

 완정(玩亭, 이서구李書九)씨의 시론은 너무도 특이하다. 시의 성율(聲律)은 말하지 않고 시의 색채만을 말한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시의 글자는 대나무와 부들에 비유할 수 있고, 시의 글월은 엮은 발과 자리에 비유할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글자는 그저 새까맣게 검을 뿐이고, 대나무는 말라서 누렇고, 부들은 부옇게 흴 뿐이다. 그런데 쪼갠 대나무를 엮어 발을 만들고 부들은 엮어 자리를 만들되, 줄을 맞추고 거듭 겹쳐서 짜면, 물결이 출렁이듯 무늬가 생겨나서 잔잔하기도 찬란하기도 하다. 그래서 원래의 누런 빛이나 흰빛과는 다른 새로운 빛깔을 만들어낸다. 그렇듯이 글자를 엮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배열하여 글월을 이루었을 때에는 마른 대나무와 죽은 부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에 그치겠는가?"

 

 그가 말하는 색채라는 것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완정씨가 하는 말을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만은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때로는 하루 내내 열심히 이야기하여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나도 그 이야기가 어디에 근거하는지는 몰랐다.

 

 병신년(1776) 여름에 완정씨가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자 서울에 있기가 싫어져 호상(湖上)에 나가 머물다가 거기서 다시 동쪽 산골짜기로 들어가 지냈다. 여러 달 만에 돌아와 자신이 지은 『호산음고湖山吟稿』 한 권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살펴보았더니 모두가 어부의 노래, 나무꾼의 소리로, 밝고 정갈하면서도 가락이 유창하였으며, 은은하면서도 생생하였다. 손으로 매만지면 만져질 것도 같고 곁눈질하여 살짝 보면 바로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를 놀려서 "이것은 또 무슨 색깔이지?" 물었다. 완정씨는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오? 눈을 그리고 달을 그리는 사람은, 다만 구름기운을 펼쳐놓음으로써 눈과 달을 저절로 볼 수 있게 만든다오. 꼭 금빛 물감과 붉은 물감을 발라야만 색채라고 하겠소?"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제야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의 시 이야기는 육서六書에 뿌리를 두고 있구려. 육서를 헤아려보면, 첫째는 상형象形이고, 둘째는 회의會意이고, 셋째는 지사指事지요. 그림은 상형에 장기가 있고, 시는 회의에 장기가 있으며, 산문은 지사에 장기가 있지요. 그러나 시가 없는 그림은 메말라서 운치가 없고, 그림이 없는 시는 깜깜하여 빛이 나지 않지요. 시와 산문, 글씨와 그림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 되어야지, 제 각각이어서는 바람직하지 않은데 그런 사실을 여기에서 알았소."

 

마침내 그가 한 말을 기록하여 서문을 삼는다.

 

 

 

 

----------------------------------

-글에 대한 해설-

시에는 색깔이 있다

원제 : 湖山吟稿序(호산음고서)

 

 

 유득공과 이서구는 우리 한시사에서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이름난 시인이다. 두 시인 사이에 시와 색채의 문제를 두고 오고간 대화를 엮어보니 그것이 한 편의 서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글이 자연스럽기도 하고, 글이 나온 배경도 이해할 수 있으며, 생생한 느낌도 살아난다.

 

 문자로 이루어진 시의 색깔은 "그저 새까맣게 검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검은 "글자를 엮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배열하여 글월을 이루었을 때" 그 시는 삼라만상의 찬란한 색채와 다채로운 물상을 독자의 눈에 또렷하게 떠오르게 한다. 검은 문자가 절표하게 조합되어 좋은 시를 지었을 때 그 시는 "손으로 매만지면 만져질 것도 같고 곁눈질하여 살짝 보면 바로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논지가 신선하고 글이 아름답다.

 

 실제로 이들 시인의 시를 감상하면, 독자의 눈에 삼삼하게 실경을 떠오르게 한다. 대단히 감각적인 이들의 시가 나오게 된 이론적 탐색 과정을 잘 보여준다.

 

 

 

 

 

출처 :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글쓴이 : 김나현 원글보기
메모 :

'삶과 마음의 풍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봄은 가고 / 정동묵  (0) 2016.04.05
책 읽는 할머니  (0) 2016.02.22
보리암에서  (0) 2015.09.30
《수필과비평》 2015년 하계수필대학세미나   (0) 2015.08.31
[스크랩] 산에서 길을 찾다  (0) 201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