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는 바보가 아니다
1930년대의 시인 이상은 '거울'이란 시에서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었을것이오'라고 거울 속의 세상이 조용하다고 노래했다. 거울 속의 세상이 조용한지 시끄러운지 증명된 바는 없다. 만약 거울 속의 세상이 있다면 그곳은 조용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증명되지 않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보편성이다. 문학은 개인적인 체험을 다루지만 이 보편성에 의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사람들은 왜 들어가보지도 않았으면서 거울 속의 세계가 조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리가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소리 없는 세계로 생각되는 또 한 곳은 깊은 바다 속이다. 휙 베송 감독의 영화 <그랑불르>를 보면 바다 깊이 잠수하는 남자들이 나온다. 죄고의 잠수부 엔조와 자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거의 사백피트까지 잠수한다.
그들이 들어가본 그 바다 속의 세계는 아득한 적막과 어둠이 가득한 세계로 묘사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자크는, 사랑하는 애인 조안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스로 아득한 바다 속의 세계로 영원히 들어간다. 조안나는 바다 속에는 어둠과 적막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울부짖지만, 자크는 바다 밑으로 아득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자크는 바다 밑의 고요에 영혼을 사로잡혔던 것인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하는 사람은 고요한 공간을 구한다. 그러나 좀더 심각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 가령 수도승 같은 이들에게는 고요가 어떤 경계를 뜻하기도 한다. 이때 고요는 마음의 고요 또는 내면의 고요와 구분되지 않는다. 어떤 종교나 문화에서건 심각하게 진리는 구하고 절대자를 찾아가는 수도승들은 세상에서 아득히 떨어진 먼 곳으로 숨어들어가 고요와 허적의 공간을 구한다. 그들은 그러한 공간에서 내면 역시 흔들림 없는 고요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고요를 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공부가 된다. 추사 김정희의 고택에 가면 '반나절은 책을 읽고, 반나절은 고요히 앉아 있는다.'라고 쓰인 주렴이 있다. 고요함을 배우고 얻는 것이 옛사람들에게는 공부의 중요한 일부였다. 고요의 경계에 도달했을 때, 새로운 진리의 경계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영혼의 결핍을 강하게 느낄 때 간절하게 고요한 공간으로 찾아가려 하는 것 같다.
고요 속에는 어떤 물질이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고요 속은 마치 짙은 어둠 속처럼 어떤 막에 둘러싸인 느낌이다. 고요의 밀도는 보통 대기의 밀도보다 높다. 즉 '여백의 미학'은 '비어 있음의 충만함'과 연결되어 있다.
끌랭, 무제,1960
침묵이나 투명을 한없이 겹치면 파란빛이 난다.
코발트 블루나 페르시안 블루에도 오랜 퇴적암 속의 화석처럼
침묵과 고요가 들어 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은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보다 더 잘 연주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슈나벨에게는 악보상의 쉼표도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연주하는 것이다. 오히려 쉼표를 연주하는 것이 음표를 연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마치, 고요히 앉아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의외로 매우 힘들거나 매우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의 필수과목으로 '정좌'라는 과목을 넣고, 일주일에 몇 시간이라도 고요하게 앉아 있는 공부를 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요즘 문화가 점점 천박해지고 야단스러워지고 세상이 불안해지는 이유가 이 고요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의 변화는 고요를 점점 바보로 만들지만, 고요는 바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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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호 지음, 『일요일의 마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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