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범종 소리 듣는 저녁 /김나현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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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11-15 19:48:12
- | 본지 22면
보제루 기둥에 기대어 범종 소리를 듣고 있다. 어스름 내리는 불이문 지붕 위로 종소리가 가물가물 사라진다. 법고가 한바탕 휘몰아치고 목어와 운판도 잠깐 울렸다. 바통을 받은 종소리를 따라 종각이 건너편으로 보이는 보제루 기둥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 들어 천년고찰 범어사가 부산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부쩍 든다. 은행나무 고목에 나부끼는 순금 빛 단풍을 보러 가기도 하고, 금정산 자락으로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를 듣고 싶어서 갈 때도 있다. 가톨릭인이지만 정갈한 기운과 여백이 향수처럼 드리우면 불쑥 절을 찾곤 한다.
종이 느리게 울리는 동안 기린 출산을 지켜보던 긴 시간이 떠오른다. 태국 파타야에서 악어 쇼를 보러 간 길이었다. 기린 사육장을 지나다 보니 기린들 움직임이 어딘가 어수선했다. 그 수상한 기척은 한 기린의 산고가 원인이었다는 걸 곧 알았다. 새끼는 어미의 자궁에서 머리가 나온 상태였다. 어미는 선 채로 불안하게 오가며 출산하는 중이었다.
감동한 건 다른 기린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기다란 목을 끄덕이며 산통 중인 기린에게 다가와선 출산을 지켜보는 거였다. 악어 쇼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때 귀한 광경을 울타리 밖에서 지켜보며 애태웠다. 두 시간여가 지난 후에야 새끼는 온전히 세상으로 나왔다. 보는 이에게도 어미에게도 아주 긴 시간이었다. 기린이 새끼를 낳던 시간과 범종이 울릴 때의 간절함은 동질감으로 연결된다.
종소리가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도록 이끌어준다는 의미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러나 마음을 집중시키고 생각을 순하게 하는 건 맞는 것 같다. 한겨울 백담사에서 들었던, 내설악을 울리던 저녁 범종 소리는 속에 울린 반향이 컸다. 생전 처음으로 들은 범종 소리이기도 했다. 어둑한 종각 주변으로 장승처럼 선 사람들 틈에 서서 어둠 속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종이 소리를 한 번 낼 때마다 찌르르한 전율이 일었다. 아마 그때부터이지 싶다. 범종 소리가 뇌리에 맴돌기 시작한 것이.
슬로베니아 블레드호수에 작은 블레드섬이 있다. 이곳 성모승천성당에는 세 번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의 종이 있다. 슬라브인들이 신을 모신 신전 자리였다는 이곳에서는 누구나 종을 울리고 싶어 한다. 높은 천장에서 늘어뜨린 줄을 살짝 잡아당기자, 햇살이 자욱하게 들이치는 성전으로 종소리가 아득히 퍼졌다. 그때도 염원을 품었듯 종소리를 들으면 왠지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 범종 소리를 들을 때는 두말 할 것도 없다.
통도사에서는 동절기 사물 타종을 저녁 여섯 시에 한다. 어느 날 일찌감치 도착해서 경내를 돌아보고 범종루 주변에 앉아 시간을 기다렸다. 날이 어둑해졌건만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종루 주변으로 띄엄띄엄 앉아들 있었다. 타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풋풋해 뵈는 스님 몇 분이 종루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종루 앞으로 조용히 와서 선다. 입동 지난 저녁 날씨는 꽤 쌀쌀했다. 바짓가랑이로 스미는 냉기에 다리를 옴짝대며 법고, 목어, 운판까지 친 뒤에 타종을 시작한 서른세 번의 종소리를 다 함께 들었다. 대종 몸통이 당목에 맞아 울 때마다 마치 내가 맞는 듯 몸이 움찔댔다. 어느 스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통도사 범종이 내는 소리는 장엄하고 웅장했다. 잠깐이나마 번뇌를 끊게 하는데 이만한 소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범어사에 가면 보제루를 통과하기 전에 하는 행동이 있다. 문 앞 몇 계단을 내려서서 불이문 쪽을 내려다보는 일이다. 높직이 바라보는 이 구도 앞에서 늘 감탄한다. 건축양식이라든가 하는 전문적인 소양은 없지만 차분하게 안겨드는 구도라고 할지. 불이문으로 옷깃을 여미고 들어서는 방문객을, 지붕 위로 흘러가는 구름과 지붕 위에 쌓인 나뭇잎을, 그 너머로 보이는 금정산자락의 말간 기운에 심산하던 속도 차분해진다. 이런 후에 대웅전이 저만치 보이는 마당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이윽고 범종 소리가 멎었다. 잠시 후 보제루에서 스님들 합동 예불 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고서야 바닥에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사위는 어둠 속으로 침잠하고 경내엔 불경 소리만 가득하다. 장엄한 소리의 배웅을 받으며 절을 나선다.
수필가·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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