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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감성터치] 젊은이 복 받으시게

by 서정의 공간 2021. 12. 1.

[감성터치] 젊은이 복 받으시게 /김나현

  • 김나현 수필가
  •  |   입력 : 2021-11-28 19:05:2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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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지니던 물건들을 잃어버리면 상심이 크다. 그것이 날마다 쓰는 물건이면 말할 나위 없다. 가방에 넣지 않아 흘리는 소지품이 한둘이 아니다. 양산 안경 손수건 휴대폰….

한데 이런 걸 다 넣은 가방을 두고 왔으니 생각마저 일순 정지됐다. 그날 저녁 설거지까지 끝내고서야 가방이 없다는 걸 알았다. 시외버스터미널 주차장에서 자동차 트렁크에 김장김치 통만 날름 실었다. 잠깐 내려놓은 가방이란 존재는 까마득히 잊었다.

블랙박스를 돌려보고, 파출소에 분실 신고하고…. 저녁 아홉 시가 되어 부랴부랴 터미널로 달려갔다. 신분증과 현금과 각종 카드가 든 지갑, 글 자료가 담긴 USB 보온병 화장품 파우치 교통카드 안경 모자 충전기 백팩까지. 없으면 당장 아쉬운 것들이다. 하나만 잃어도 허전한데 깡그리 사라지니 제정신이 아니다.

깊은 자책에 젖었을 때 떠오른 글 하나가 있다. 박완서 작가가 쓴 기행 산문 ‘잃어버린 여행 가방’이다. 작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방을 잃어버린 같은 처지로 쓰린 마음을 위로할 겸 다시 읽었다. 내가 겪기 전에는 다른 사람도 별별 사유로 가방을 잃어버리는가 보다 하는 동질감이 드는 정도였다.

작가는 여행지 공항에서 다른 문인들 짐과 함께 짐가방을 부쳤다. 한데 김포공항에 내려서 보니 황망하게도 자신의 가방만 빠졌다. 그는 이 일로 오랫동안 가슴앓이했다고 했다. 2주간 여행하며 한 번도 씻지 않은 겉옷과 속옷, 양말이 꾸역꾸역 냄새를 풍기며 누군가에게 적나라한 속을 보일 수치감으로 괴로웠다고. 물론 그 행간에는 잃어버린 속상함이 기본으로 깔려있을 테다. 작가의 베이지색 여행 가방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글 속에는 여행한 흔적을 통째 날린 허탈함도 분명 포함됐으리라.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물건만 잃는 게 아니다. 거기에 엮인 추억까지 날린 안타까움이 더한다. 그곳에 두고 온 가방 속 물건마다 내 온기가 묻지 않은 게 없다. 물건을 잃은 사람은 본의 아니게 죄를 짓는다던가. 자신의 추측이 진실이 아닌 데도 진실인 양 확정지어 누군가를 의심한다는 것이다.

맘이 초조해진 나도 다를 바 없었다. 의심이 가는 뭇 대상을 만들고 이런저런 경우를 상상했다. 주차장을 청소하던 사람이 봤을까, 그 옆 흡연 장소에서 담배 피우던 사람이 들고 갔을지도 몰라, 그곳을 들고나던 운전자는 아니었을까….

가방을 잃은 밤은 유독 길었다. 가방을 찾지 못하면 꽤 오랫동안 가슴앓이할 게 뻔했다. 동트기 바쁘게 터미널 근처 파출소로 갔다. CCTV로 어떤 사람이 들고 간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관이 순찰차를 앞세우고는 따라오라고 한다. 한산한 휴일 아침부터 경찰이 출동하고 웬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다니자 직원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가방을 잃어버려서요.” 맘이 급해 묻지도 않은 답을 먼저 했다. “연락처도 엄꼬…”라고 혼잣말한 직원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긴다. 한 가닥 희망의 불빛이 뇌리를 반짝 스쳤다. 쪼르르 따라붙었다. 터미널 귀퉁이 한 칸짜리 간이사무실 쪽이다. 그가, 채워둔 자물쇠를 열고 눈에 익은 자주색 백팩을 꺼내는 순간 그만 꺽꺽 울음이 터졌다. 하룻밤 지옥이 단박에 광명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누군가를 오해한 마음이 초라해졌다. 흘리고 온 가방이 주인에게 돌아오는 세상이라니. 밤사이 시름이 안도로 바뀌어 눈물을 찔끔대자 직원이 무심하게 한마디 한다. “와 우요?”라고. “너무 고마워서예.” 감동에 북받쳐 말했다. 담배를 피우던 어느 젊은이가 덜렁 놓인 가방을 발견했고, 직원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요즘 가방을 두고 가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위로인 듯 덧붙인다. 상황을 지켜본 경찰관도 돌아갔다.

이런 청년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꽃밭인 듯 아름답다. 정의롭게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게 한껏 샘솟는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젊은이, 부디 대대손손 복 받으시게.

수필가·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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