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신록의 지리산 삼사 抄錄(초록)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7-10 19:48:23
- | 본지 22면
계단 위로 보제루 뒤쪽 문이 활짝 열렸다. 겨울에 굳게 닫혔던 문마다 사진 액자처럼 한두 얼굴 내밀고 앉아 있다.
대웅전을 마주한 앞쪽으로도 띄엄띄엄 앉은 이들이 무료해 보이는 여름 한낮. 숨도 돌릴 겸 그늘 반 평 차지하고 앉았다. 저만치로 각황전과 화엄사 명물 매화나무가 보이는, 그리던 풍경 속에 들어온 유월 어느 날이다.
금당선원을 둔 쌍계사, 국보 각황전 천장을 받친 기둥이 웅장한 화엄사, 보리수 노거수에다 지리산 노고단 가는 길이 이어지는 천은사 순례길에 들었다. 세 절은 지리산 삼사에 천년 고찰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천지의 신이 사람 감시를 중단하고 잠시 휴식한다는, 윤달 기간도 아니다. 올해는 윤달이 없다. 윤달이 들면 불자들은 바쁘다. 산 사람을 위한 재라는 예수재를 봉행하고, 삼사 순례에, 공덕이 가장 큰 보시라는 가사(袈裟)를 불사한다. 내게는 그런 불심은 없고 고찰을 즐겨 찾는 팬심에 가깝겠다. 더구나 가톨릭인으로 절이 좋으니 순례는 핑계다.
쌍계사는 해동범패의 근본 도량이다. 몇 해 전, 지리산 둘레길을 걷던 중에 쌍계사에 들렀는데 마침 범패공연을 한다. 웬 행운인가 하고 자리 펴고 앉았다. 스님의 범패 소리는 성가에 익숙한 귀에도 이질감이 없다. 월명사가 지은 향가 ‘도솔가’를 범패 시작으로 본다면, 쌍계사는 그 시초를 이어받은 절이 아닌가.
절에 가는 목적은 딱히 없다. 심기가 닿는 접점이 생기면 또 가고 싶은 맘이 들어차는 것 같다.
쌍계사 하면 은행나무부터 떠오른다. 일주문 주변에 한 그루, 팔영루 마당에 한 그루, 금당 가는 계단 옆에 한 그루가 있다. 팔영루를 지나 금당으로 가는 가파른 계단 끝에 돈오문이 나온다. 이 돈오문 기와 얹은 담장 너머로 순금 빛을 띤 은행나무를 보는 가을 운치는 황홀하다.
이 돈오문에서 금당에 이르는 계단이 108개. 파초가 싱그러운 팔상전을 끼고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금당이 나온다. 금당은 법당에 불상이 아닌 탑을 모신 국내 유일한 전각. 이 전각 마당에 서서 내려다보는 절 풍경이 불전 못지않게 평화롭다. 그 풍경을 보러 왔는데 오호라. 금당 선원은 하안거 중이다. 음력 4월 보름부터 돈오문에 빗장이 걸렸다고. 돌아서는 허탈한 심기가 대웅전 앞 천년 마애여래좌상 미소 앞에서 스르르 풀린다.
화엄사는 국보 각황전보다 흑매 존재감이 더 클 터. 경내로 들어서며 멀리 매화나무부터 찾는다. 통째 꽃불 피운 고목이 저리 푸르를 줄이야. 매화 피는 삼월 중순엔 중생의 눈과 가슴을 홍조로 물들이는 나무가 아닌가. 스님 예불 소리에 매화나무도 수행에 든 시간. 그 그늘을 오롯이 차지하고 앉았으니 묵상이 따로 없다.
앞쪽 각황전에 무시로 불도가 들락인다. 주말엔 석가모니불도 절받으랴 바쁘시겠다. 절에 왔으니 묵례라도 함이 예의일 터. 기복과 구원 담은 삼배로 화엄사를 마감한다.
천은사 주불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이다. 보물 아미타후불탱화도 뒷전이고 잎이 한창 무성한 보리수나무로 향한다. 연한 겨자색 꽃이 조롱조롱 피었는데 잎과 꽃이 반반이다. 이백오십 살 먹은 나무 아래 놓인 벤치는 절 경내가 한눈에 드는 명당. 태양을 피할 겸 앉아 극락보전에서 들리는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원 없이 들었다. 가만 귀 기울여 들으니 비구니스님 염불 소리에 애절함이 배었다. 녹음 우거진 지리산 자락에 목탁 소리, 염불 소리 낭랑하다.
‘아코모다도르’, 파울로 코엘류가 ‘오 자히르’에서 언급한 이 말의 의미처럼, 나아가길 포기하고 순응하게 되는 어떤 순간, 자포자기에 가까운 상태로 진퇴양난에 처했을 때, 갈만한 자신만의 장소를 두었는지.
눈도 소처럼 순해지는 풀내 진동하는 산야. 이런 산속에 옴팍하게 들어앉은 절이 아삼삼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그럴 때 길 나서는 거다.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 천년을 초록하고 여름 복판으로 들어선다.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대웅전을 마주한 앞쪽으로도 띄엄띄엄 앉은 이들이 무료해 보이는 여름 한낮. 숨도 돌릴 겸 그늘 반 평 차지하고 앉았다. 저만치로 각황전과 화엄사 명물 매화나무가 보이는, 그리던 풍경 속에 들어온 유월 어느 날이다.
금당선원을 둔 쌍계사, 국보 각황전 천장을 받친 기둥이 웅장한 화엄사, 보리수 노거수에다 지리산 노고단 가는 길이 이어지는 천은사 순례길에 들었다. 세 절은 지리산 삼사에 천년 고찰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천지의 신이 사람 감시를 중단하고 잠시 휴식한다는, 윤달 기간도 아니다. 올해는 윤달이 없다. 윤달이 들면 불자들은 바쁘다. 산 사람을 위한 재라는 예수재를 봉행하고, 삼사 순례에, 공덕이 가장 큰 보시라는 가사(袈裟)를 불사한다. 내게는 그런 불심은 없고 고찰을 즐겨 찾는 팬심에 가깝겠다. 더구나 가톨릭인으로 절이 좋으니 순례는 핑계다.
쌍계사는 해동범패의 근본 도량이다. 몇 해 전, 지리산 둘레길을 걷던 중에 쌍계사에 들렀는데 마침 범패공연을 한다. 웬 행운인가 하고 자리 펴고 앉았다. 스님의 범패 소리는 성가에 익숙한 귀에도 이질감이 없다. 월명사가 지은 향가 ‘도솔가’를 범패 시작으로 본다면, 쌍계사는 그 시초를 이어받은 절이 아닌가.
절에 가는 목적은 딱히 없다. 심기가 닿는 접점이 생기면 또 가고 싶은 맘이 들어차는 것 같다.
쌍계사 하면 은행나무부터 떠오른다. 일주문 주변에 한 그루, 팔영루 마당에 한 그루, 금당 가는 계단 옆에 한 그루가 있다. 팔영루를 지나 금당으로 가는 가파른 계단 끝에 돈오문이 나온다. 이 돈오문 기와 얹은 담장 너머로 순금 빛을 띤 은행나무를 보는 가을 운치는 황홀하다.
이 돈오문에서 금당에 이르는 계단이 108개. 파초가 싱그러운 팔상전을 끼고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금당이 나온다. 금당은 법당에 불상이 아닌 탑을 모신 국내 유일한 전각. 이 전각 마당에 서서 내려다보는 절 풍경이 불전 못지않게 평화롭다. 그 풍경을 보러 왔는데 오호라. 금당 선원은 하안거 중이다. 음력 4월 보름부터 돈오문에 빗장이 걸렸다고. 돌아서는 허탈한 심기가 대웅전 앞 천년 마애여래좌상 미소 앞에서 스르르 풀린다.
화엄사는 국보 각황전보다 흑매 존재감이 더 클 터. 경내로 들어서며 멀리 매화나무부터 찾는다. 통째 꽃불 피운 고목이 저리 푸르를 줄이야. 매화 피는 삼월 중순엔 중생의 눈과 가슴을 홍조로 물들이는 나무가 아닌가. 스님 예불 소리에 매화나무도 수행에 든 시간. 그 그늘을 오롯이 차지하고 앉았으니 묵상이 따로 없다.
앞쪽 각황전에 무시로 불도가 들락인다. 주말엔 석가모니불도 절받으랴 바쁘시겠다. 절에 왔으니 묵례라도 함이 예의일 터. 기복과 구원 담은 삼배로 화엄사를 마감한다.
천은사 주불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이다. 보물 아미타후불탱화도 뒷전이고 잎이 한창 무성한 보리수나무로 향한다. 연한 겨자색 꽃이 조롱조롱 피었는데 잎과 꽃이 반반이다. 이백오십 살 먹은 나무 아래 놓인 벤치는 절 경내가 한눈에 드는 명당. 태양을 피할 겸 앉아 극락보전에서 들리는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원 없이 들었다. 가만 귀 기울여 들으니 비구니스님 염불 소리에 애절함이 배었다. 녹음 우거진 지리산 자락에 목탁 소리, 염불 소리 낭랑하다.
‘아코모다도르’, 파울로 코엘류가 ‘오 자히르’에서 언급한 이 말의 의미처럼, 나아가길 포기하고 순응하게 되는 어떤 순간, 자포자기에 가까운 상태로 진퇴양난에 처했을 때, 갈만한 자신만의 장소를 두었는지.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성터치] 관조하는 즐거움 (1) | 2022.12.05 |
---|---|
[감성터치] 타인의 고통 (0) | 2022.09.26 |
길들어가며 사는 일 (0) | 2022.05.02 |
[감성터치] 세상의 아버지 (0) | 2022.03.20 |
[감성터치] 젊은이 복 받으시게 (0) | 2021.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