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타인의 고통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9-25 19:11:23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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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부지깽이도 일손을 거든다는 농번기였다. 어머니는 아궁이 솥에 쌀을 안치고 ‘불 때다가 솥에서 따닥따닥 소리가 나면 불을 끄면 된다’고 당부하고 들에 나갔다. 밥하는 불을 끄는 시기를 가늠하기란 어린 인생 최대 난제였다. 하마 소리가 들릴까 온 신경을 쏟는데 불길한 냄새가 얼핏 코를 스쳤다. 그 냄새가 부엌 벽 틈새로 새어 나가 뒷집 담을 넘었나 보다. 뒷집 친구 영옥이 올케의, 밥 탄다고 불을 끄라고 하는 외침을 듣고서야 놀라 불을 껐다.
해가 긴 여름, 어둑발이 내려서야 퀭한 모습으로 들어선 어머니는 두리반부터 폈다. 땀에 전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어 보였다. 밥을 태운 죄가 있으니 아이는 풀이 죽었다. 솥뚜껑을 여니 밥이 새카맸다. 밥을 푸던 어머니도, 탄 밥을 드시던 아버지도 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벼이삭 패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때 어머니는 벼꽃처럼 풋풋한 서른 초반이었다.
구순이 목전인 노모는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단다. 긴 시간을 반으로 접어 건너뛴 듯 노쇠한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동구 밖까지 나와 자식을 배웅하다가, 그나마 운신할 땐 지팡이를 짚고 대문 밖에서 보내다가, 어느 날인가부터는 평상에 앉은 모습을 두고 나왔다. 요즘은 아랫목에서 눈을 맞춘다. 대문 밖까지 나와 떠나는 자식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눈에 습기가 찬다. 그런 노모에게 대상포진에 코로나까지 덮쳤다. 수분이라고는 다 마른 어머니라는 대지를 깜부기 같은 질병이 야금야금 세를 넓힌다.
자식도, 부모가 늙고 병들어감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방관자나 다름없다. 어머니가 점점 왜소해지고 의식이 흐려지는 속도를 느끼며 그런 생각이 든다. 혈육으로 이어졌지만 내가 아닌 타자가 겪는 고통이다.
이럴 때 ‘타인의 고통’이란 말이 뇌리에 맴돈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이 쓴 에세이 ‘타인의 고통’은 제목부터 섬뜩하다. 타인의 고통이라는 말 자체가 바라보는 자의 관점이 아닌가.
작가는 타인의 고통이 어떻게 다가오며 바라보는가를 이라크 전쟁 전후 사진을 통해 제시한다. 전장 사진은 보는 자체가 고통스러울 만큼 끔찍하다. 그러나 전이되지 않는 이 고통을 향한 연민이라는 것도,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알리바이가 돼버린다고. 어머니가 겪는 신체 고통을 지켜보는 일도 이와 뭐가 다르겠는가.
요즘 다양한 재해를 접한다. 전쟁 폭우 화재 태풍…, 이로 말미암은 피해자가 겪는 괴로움도 전이되지 않는 연민과 다를 바 없다. 재해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투병 소식을 접할 때도 그와 다르지 않다. 깊이 마음 아프지만 덜어줄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고통…. 노모 홀로 감내해야 하는 육신의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내 부모가 밤샘 고통에 시달려도 거기에 동참할 수 없다. 심지어 아프다는 말도 자주 접하면 혹 무뎌질까 경계한다. 수전 손택이 염려한 바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별 도움 되지 않는 한숨만 는다.
삼십 대를 건너던 당신은 어느덧 생의 소실점을 향하는 중이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을 서두르는 어머니와 이를 바라보는 자식을 이은 끈이 위태롭다. 드라마 결말을 예견한 듯 서로 과거로 회귀하는 일도 잦아졌다. 혈연 속에서 함께한 숱한 찰나가 대하소설처럼 장면을 이동하며 재생된다. 다만, 서로 다른 시점과 다른 기억으로 애틋해 하며.
벼이삭 패는 처서도 지나고 추석도 지났다. 고향 집 앞 논엔 개구리울음 대신 풀벌레 소리 왁자하다. 들녘은 바야흐로 벼에 물알 들어 알곡을 품는 때다.
어머닌 아랫목에서도 들녘 사정을 들고 꿴다. 추석을 쇠었으니 달포나 있으면 벼를 베겠다고.
솥에서 따닥따닥 소리가 나면 불을 끄라던 그맘때를 지나는 중이다. ‘쪼들리는 살림에 자식 키우느라 고생하셨어요’. 혹, 말할 시간을 놓칠까 싶어 어머니 손을 잡고 또박또박 전했다. 거죽 밀리는 손이 싸늘하다. 어머니란, 타인의 고통이 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해가 긴 여름, 어둑발이 내려서야 퀭한 모습으로 들어선 어머니는 두리반부터 폈다. 땀에 전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어 보였다. 밥을 태운 죄가 있으니 아이는 풀이 죽었다. 솥뚜껑을 여니 밥이 새카맸다. 밥을 푸던 어머니도, 탄 밥을 드시던 아버지도 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벼이삭 패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때 어머니는 벼꽃처럼 풋풋한 서른 초반이었다.
구순이 목전인 노모는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단다. 긴 시간을 반으로 접어 건너뛴 듯 노쇠한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동구 밖까지 나와 자식을 배웅하다가, 그나마 운신할 땐 지팡이를 짚고 대문 밖에서 보내다가, 어느 날인가부터는 평상에 앉은 모습을 두고 나왔다. 요즘은 아랫목에서 눈을 맞춘다. 대문 밖까지 나와 떠나는 자식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눈에 습기가 찬다. 그런 노모에게 대상포진에 코로나까지 덮쳤다. 수분이라고는 다 마른 어머니라는 대지를 깜부기 같은 질병이 야금야금 세를 넓힌다.
자식도, 부모가 늙고 병들어감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방관자나 다름없다. 어머니가 점점 왜소해지고 의식이 흐려지는 속도를 느끼며 그런 생각이 든다. 혈육으로 이어졌지만 내가 아닌 타자가 겪는 고통이다.
이럴 때 ‘타인의 고통’이란 말이 뇌리에 맴돈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이 쓴 에세이 ‘타인의 고통’은 제목부터 섬뜩하다. 타인의 고통이라는 말 자체가 바라보는 자의 관점이 아닌가.
작가는 타인의 고통이 어떻게 다가오며 바라보는가를 이라크 전쟁 전후 사진을 통해 제시한다. 전장 사진은 보는 자체가 고통스러울 만큼 끔찍하다. 그러나 전이되지 않는 이 고통을 향한 연민이라는 것도,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알리바이가 돼버린다고. 어머니가 겪는 신체 고통을 지켜보는 일도 이와 뭐가 다르겠는가.
요즘 다양한 재해를 접한다. 전쟁 폭우 화재 태풍…, 이로 말미암은 피해자가 겪는 괴로움도 전이되지 않는 연민과 다를 바 없다. 재해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투병 소식을 접할 때도 그와 다르지 않다. 깊이 마음 아프지만 덜어줄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고통…. 노모 홀로 감내해야 하는 육신의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내 부모가 밤샘 고통에 시달려도 거기에 동참할 수 없다. 심지어 아프다는 말도 자주 접하면 혹 무뎌질까 경계한다. 수전 손택이 염려한 바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별 도움 되지 않는 한숨만 는다.
삼십 대를 건너던 당신은 어느덧 생의 소실점을 향하는 중이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을 서두르는 어머니와 이를 바라보는 자식을 이은 끈이 위태롭다. 드라마 결말을 예견한 듯 서로 과거로 회귀하는 일도 잦아졌다. 혈연 속에서 함께한 숱한 찰나가 대하소설처럼 장면을 이동하며 재생된다. 다만, 서로 다른 시점과 다른 기억으로 애틋해 하며.
벼이삭 패는 처서도 지나고 추석도 지났다. 고향 집 앞 논엔 개구리울음 대신 풀벌레 소리 왁자하다. 들녘은 바야흐로 벼에 물알 들어 알곡을 품는 때다.
어머닌 아랫목에서도 들녘 사정을 들고 꿴다. 추석을 쇠었으니 달포나 있으면 벼를 베겠다고.
김나현 수필가·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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