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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화』

『설국』의 다카항高半료칸旅館을 찾아

by 서정의 공간 2015. 2. 7.

<여행작가>2014년 9/10월호

 

 

『설국』의 다카항高半료칸旅館을 찾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설국』의 첫 문장은 절묘했다. 기차가 국경을 잇는 터널에서 나올 때 딴 세상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압축한 문장이다. 주인공 시마무라를 따라 긴 터널을 벗어날 때 시야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첫 문장 속 국경은 군마현과 니카타현의 접경을 일컫는다.

소설을 따라,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눈뿐인 차갑게 가라앉은 적요한 마을에 왔다. 전혀 다른 세상처럼, 첩첩이 겹쳐진 우람한 산이 봄 햇살에 새하얗게 반짝인다. 기차가 이전 역을 출발했을 때만 해도 차창밖엔 벚꽃이 한창 만개하고, 들판에는 보리가 새파랗게 자라거나 때 이른 아지랑이가 보일 듯 봄빛이 완연했다. 그런데 고장이 바뀌는 터널을 빠져나오자 4월에 겨울이 머물고 있다. 터널을 벗어나며 보았을 이 고장만의 풍취가 소설 첫 문장으로 탄생했음을 알겠다.

작가가 외진 한촌에 불과한 유자와 온천에 머물게 된 건, 자연 풍경 묘사에 대한 작가로서의 관심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당시의 문학, 특히 소설이 자연에서 멀어지고, 자연을 표현하는데 낡고 구태의연한 단어들만 떠올린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이런 고뇌에 젖은 작가와 유자와 마을의 한적한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졌을 것 같다.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

이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몸 울림’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 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기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리고, 눈에 갇힌 채 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고장에 눈의 계절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소설 속 문장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다. 작가가 젊은 시절에 쓴 단편 <저녁 풍경의 거울> 이후, 이 작품의 소재를 살려 단속적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연작 형태로 완성했다. 그래서 기승전결이 분명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인물 심리변화와 주변 자연 묘사에 상당 부분 치중하고 있다. 읽다 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가하고 의문에 잠기기도 한다. 다소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인물의 사소한 표정이나 말투, 몸동작에서 감정 흐름을 읽어내고, 자연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 문체의 결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크다. 세밀한 밑그림 같은 담백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이 정결해지는 느낌이랄지.

소설의 핵심은 순간순간 덧없이 타오르는 여자의 정열에 있다. 개통한 지 얼마 안 된 시미즈터널 밖으로 나오면 눈의 고장, 설국이다. 그 한갓진 곳의 온천장에서 게이샤로 살아가는 고마코,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야성적 정열과는 대조적으로 순진무구한 청순미로 시마무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요코. 이 두 여자를, 도쿄에서 온 무위도식하는 여행자 시마무라는 허무의 눈으로 지켜본다.

나는 소설 문장 전개보다도, 상상이 되지 않는 엄청난 눈에 덮인 세상이 과연 어떨까가 궁금했다. 오래전부터 설국에 가기를 꿈꾸었다. 과연 집은 눈에 파묻혀 지붕만 보이고, 적설량을 표시하는 긴 작대기의 어디까지 눈이 쌓였을까 하고. 막연하게 꿈꾼 지 오래인데 지금 믿기지 않게도 그 설국에 와있다. 와서 보니 지붕만 빠끔 보이는 게 아니라 지붕마다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길가 잣눈을 발로 툭 차보고 손으로 뭉쳐본다. 봄이 눈앞이라 그런가 눈은 물기를 많이 머금었다. 이곳은 눈 덕분에 스키마니아가 몰려들고, 문학의 큰 별을 찾는 독자와 문학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도쿄에서 니카타행 죠에츠신칸센(고속철도)을 타고 소설가가 머물렀던 고장에 왔다. 기차가 터널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고도의 산맥을 통과하느라 터널을 연이어 지난다. 기차 안 전광판에 상모고원을 통과하는 중이라는 안내글이 흘러나온다. 산맥을 지나는 터널은 길고 길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귀가 자주 먹먹해진다. 유자와마치는 높은 산맥에 둘러싸였다. 눅눅한 바닷바람이 산맥에 부딪혀 초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눈을 쏟아 붓는다. 적설량이 많을 때는 6m 이상 눈이 쌓일 정도라고. 터널 전과 후의 지역 기후가 이렇듯 다른 연유는 높은 산맥에 있었다.

에치코유자와역에서 나오니 척설이 곳곳에 퇴적층처럼 쌓였다. 언 땅도 녹는 봄인데 눈의 성에 들어온 듯 시야가 환하다. 햇볕은 따스한데 얼굴에 닿는 공기는 얼음처럼 차갑다. 눈 쌓인 정도를 가늠하는 눈금을 빨갛게 표시한 긴 작대기의 용도를 알겠다. 눈 쌓인 뒷산에는 스키어가 타는 리프트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산 계곡에는 눈석임물이 마치 비 온 후처럼 콸콸 흐른다. 산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스키어를 길을 가다가 서서 신기하게 구경한다. 여기는『설국』의 무대다. 눈처럼 하얀 감성을 아기자기한 문체로 쓴 소설 배경답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모신 마을이, 이 마을 사람이 부럽다. 얼마나 자부심이 클까 하고.

 

소설 속 시미즈터널의 운치를 기대한다면 작가가 타고 다녔다는 국철을 타고 가라유자와역에 내리면 된다. 유자와엔 근거리에 두 역이 있다. 에치코유자와역과 가라유자와역이다. 고속열차는 에치코유자와역에 닿기 전에 하얀 세상을 깜짝 선보인다. 봄철 눈 쌓인 산에 눈이 동그래지는데 기차는 이내 역내로 진입한다. 눈을 기대한 마음이 실망하지만 그 아쉬움도 잠시다. 마을 중심을 가른 길을 따라 다카항 여관으로 가는 길에 평생 보지 못한 규모의 눈 무더기를 만났다. 역에서 쉬엄쉬엄 걸어 당도한 다카항여관 앞, 소설 탄생지임을 알리는 간판 앞에서 두 손을 치켜들고 쾌재를 불렀다. 제목만으로 눈 나라를 꿈꾸게 한 장본인이었기에.

특히 겨울이면 온천 여관에 머물며 글쓰기를 좋아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가 묵으며 몇 편의 소설을 집필한 바로 그 여관 앞에 서서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운다.

여관은 마을이 한눈에 안겨드는 언덕배기에 자리했다. “여관방에 앉아 있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공상에도 신선한 힘이 솟는다.”라고 한 다다미방 낡은 의자에 앉아보았다. 앞쪽 전면 창밖은 산도 하얗고 마을 지붕도 하얗다. 왼편 저 아래쪽으로 작가가 타고 다녔다는 국철이 지나는 가라유자와역이 보인다. 역 뒤 스키장엔 스키를 타는 이들이 원색 옷차림으로 유유자적하다. 낡은 탁자와 의자,“ 여관주인이특별히꺼내준교토산옛쇠주전자에서부드

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라고 한 그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쇠 주전자 하나, 화로, 소설 속 고마코의 실제 모델인 게이샤 마츠에이가 썼을 법한 자그맣고 낡은 경대가 놓여 있다.

그녀는 가와바타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건물은 개축했지만 쓰던 방은 그대로 간수했다는 주인의 말이다. 이 방에 앉으면 누구라도 글 한 편 쓰고 싶겠다. 우람한 에치코산맥과 터널을 빠져나오거나 진입하는 기차, 아늑히 내려다 보이는 눈 덮인 마을, 뜨거운 온천수. 책이 출간된 1937년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한적했을 것 같다.

원래의 예스런 목조 건물은 불탔다. 양옥으로 개조하면서 멋스러움은 사라졌다. 그래도 작가의 숨결이 남은 이 여관에서 하룻밤 묵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다. 사전 준비가 충실하지 못한 여행 끝에는 이렇듯 아쉬움이 따른다. 더구나 그곳이 국내가 아닌 국외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한 번 더 가게 된다면 그땐 놓친 것도 채울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도 따른다. 언제 다시 와서 하룻밤 묵게 될지 모를 기약 없는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시간을 넉넉히 잡고 왔기에 인근 문학비까지 돌아보았다. 약도를 따라가니 특별할 것 없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그 한쪽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문학비가 덩그마니 서 있다. 소설 첫 문장을 새긴 문학비는 기찻길 너머 언덕 쪽을 향하고 섰다. 작가가 글을 구상하며 걸었을 산책로와 연결된다. 여관이 있는 언덕이 저만치 보이는데 그 사이로 신칸센이 지나는 거대한 콘크리트 교각이 가로질렀다. 기찻길이 여관과 공원 사이로 관통한다. 이 산골

고장과 어울리지 않는 괴물 같은 현대문명이다. 그러나 첫 문장에서부터 등장하는 기차는 이곳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산골과 문명의 묘한 조합도 이곳만의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문학의 힘을 실감한다. 첫 문장이 이만큼 설레고, 여행을 부추기는 글이 있을까. 그 문장으로 하여 오랫동안 여행을 꿈꾼 이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문학 탄생 현장에서 소설 속 한 문장이 된 듯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들려주는 차분한 문학 강의를 들은 기분이다. 역 도시락 에키벤을 사 들고 설국을 떠난다. 설산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는 금방 터널 속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