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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화』

동해남부선, 사라지는 길을 따라

by 서정의 공간 2015. 2. 7.

 

 

<문학도시>2014년2월호

<여행작가>2015년 1/2, 3/4 월호 

 

 

 

동해남부선, 사라지는 길을 따라

김나현

 

부산 부전~포항 간 동해안을 따라 16개 역을 거느린 동해남부선, 역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화물운송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로부터 80여 년간 수많은 인생을 굽이굽이 실어 나른 동해남부선을, 여름부터 겨울들 때까지 좌천 서생 남창 불국사 안강 포항……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가다 내리고 돌아오는 기차여행을 했다. 전 구간이 단선 철로라 마주 오는 열차에 길을 비켜주려 기차가 역내 선로에서 종종 정차했다. 이마저도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동해남부선이 철로복선화 공사로 차차로 이전되고 폐쇄될 예정이다. 사라지거나 사라질 길을 뜨거운 볕에 헉헉대며, 어느 날은 철길을 후줄근히 적시는 비를 맞으며, 승용차로, 혼자서 또는 친구와 느닷없이 떠난 느린 기차여행. 어떤 목적이 없더라도 충분히 위로받은 그 느긋한 시간 여행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울러 더 늦기 전에, 마지막 남은 오솔길 같은 이 길로 떠나보라 권하면서.

 

동해남부선의 시작 부전역

 

동해안 내륙을 달리는 이 노선을 처음부터 타려면 부전역으로 오라. 물론 부전역엔 경전선, 경부선 무궁화호 노선도 다양하게 있다. 편리한 대로 동래역이나 해운대역에서 타도 좋다. 철도 부전역은 부산지하철 1호선 부전역에서 도보로 5분여 거리, 가는 길에 부전재래시장을 지나며 기차에서 먹을 간식거리로 가방을 채우는 즐거움도 누려보자. 첫 열차가 순천에서 구물구물 달려와 부전역에서 잠시 숨 고르고 출발하는 시각이 09시 40분경. 주말엔 기장 쪽이나 경주 등지로 가는 원색 차림의 등산객이 삼삼오오 몰려들어 표를 예매하는 센스를 발휘하면 좋겠다. 보기에 흐뭇한 노부부, 다정한 부자지간, 집안 모임에 간다는 남매, 화사한 원색차림의 등산객,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일찌감치 등을 기댄 젊은이……, 기차는 이런 각양 소시민의 삶을 싣고 덜컹덜컹 흔들리며 시내를 관통하여 동래역으로 향한다.

 

도심의 기착지 동래역

동래역으로 향하는 도심의 철로 주변은 어수선하다. 복선전철공사를 하는 중이다. 어떤 신식철로가 놓일지 모르겠지만 소박하고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크다. 문명은 우리가 수긍할 정도의 느긋한 속도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때로는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의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것 같다. 고속열차가 괴물 같은 쇳덩이를 실어 와 마구잡이 부려놓는 격이랄까. 이런 걸 꼭 발전이라고 해야 하는지. 창밖으로 기차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철도건널목 너머로 줄 선 자동차들이 보인다. 나도 저들 속에서 달리는 기차를 동경했던 적 있었거니……. 동래역은 지하철 4호선 낙민역에서 5분여 거리다. 환승역으로 붐비는 도시철도 동래역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한산하다. 상인들이 동해남부선 기차를 타고 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동래역 새벽시장도 폐쇄되고, 조촐한 장이 역 앞쪽으로 열려 지난 추억의 맥을 잇고 있다.

 

바다가 가까운 송정역

유월이면 휘영청 늘어진 멀구슬나무에 자잘한 연보랏빛 꽃이 조랑조랑 피어 주변이 다 향기롭던 구 해운대역. 이곳을 출발해 미포, 청사포, 구덕포를 지나 송정역으로 향할 때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기차가 그림처럼 달리는 환상의 구간이 있었다. 윤슬로 반짝이는 바다가 온 차창을 채우고 나타나면 사람들 시선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바다를 향했다. 지금은 영영 추억 속 길이 되고 만 길. 이제 기차는 끊기고 길은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흔치않게 철길이 지나는 바닷길, 멋진 풍광이 있는 이곳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기차가 끊긴 후 어느 날 해운대 미포에서 송정 쪽으로 향하는 철길에 올라섰다. 또 하루는 역방향으로도 걸었다. 발치에서 출렁대는 바다를 굽어보며 걸을 때 뒤에서 자꾸만 기적이 들리는 듯해 돌아보았다. 언제 철길을 걸어본 적 있었던가. 기차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망연히 바라보던 동경의 시간이 떠올라 자주 걸음이 멈춰졌다. 마음에 바람이 분 어느 날엔 이 바닷길 철길을 걸어볼 일이다. 미포와 송정 사이 청사포 근처 어디쯤에선 하늘과 바다만 보이는 절경이 있음을 아시는가. 나침반처럼 오륙도가 보이고, 바다 쪽엔 난간도 없이 낭떠러지인 길에서 ‘햐~’라는 감탄사만 터지는, 영화 속 풍경보다 더 영화 같은 길도 당신을 초대한다.

송정역에서는 늘 한 무더기의 젊은이가 내린다. 우르르 내리는 그들 청춘이 부러워 뒷모습을 좇곤 했다. 바다 냄새가 나는 송정역에서는 불쑥 기차에서 내리고 싶어진다. 역 주변 기차 소리를 들으며 색이 바랜, ‘샤워 1인 일천 원’이라는 널빤지 간판 내건, 허름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민박 골목길을 따라 바다로 가고 싶어진다.

 

은행나무가 있는 좌천역

 

뭐니 해도 좌천역 터줏대감은 은행나무일 것이다. 사이사이에 짙푸른 향나무를 대동하고서 네댓 그루의 우람한 은행나무가 철길을 사열하듯 늘어섰다. 노란 이파리가 무수한 엽서처럼 나부끼다가, 훨훨 날아 철길 위로 내려앉거나 노랗게 깔린 장관을 보고 싶으면 가을이 깊을 때 좌천역으로 오면 된다.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 아이가 쓴 노란색 우산 같은, 예전 어느 곳에선가 보았을법한 노란색이 기억날 터. 11월 말 좌천역은 그야말로 은행잎 천지였다. 나무에도 화단에도 철로에도 노랗게 은행잎이 깔려있었다. 나무에선 나비처럼 은행이파리가 홀홀 바람에 떨어져 내렸다. 이 은행나무를 보고나서 집 앞 아담한 은행나무를 보자니 정말 시시해보였다. 앞으로는 좌천역을 떠올리면 은행나무를, 은행나무를 떠올리면 좌천역이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이곳 역장은 은행나무에 취한 승객들 때문에 안전문제로 신경이 부쩍 쓰일 것 같았다. 이날도 승차장 주변에서 카메라를 눌러대는 이들을 대합실로 보내느라 애를 먹었다. 무정차하는 기차가 지날 시간이 되자 모두 대합실로 들여보내는 바람에 대합실에서 잠시 숨 돌릴 수 있었다. 겨울 초입이지만 가을 날씨 같은 이런 날에는 돗자리 깔고 앉아 도시락 먹으며 기차 구경으로 두어 시간 놀다 가고 싶은 역이다. 좌천역을 나오며 노모 계신 고향집을 돌아 나오듯 자꾸 뒤돌아봐지는데, 건물 너머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배웅하듯 우뚝 서있다. 마침 ‘정식전문’이라 적혀있는 역전식당에 들어가려는데 문이 잠겨 있다. 문 닫은 식당이라는 옆집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좌천역을 돌아 나올 때 ‘관리원 없음’이라는 팻말이 붙은 철도건널목 앞에서 다시 멈춰 섰다. 철로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저만치 에, 두고 온 은행나무가 노랗게 키를 높이고 있지 않은가. 헤어지기 싫은 임과 이별하는 기분으로 돌아 나온, 마당 넓은 집 정원처럼 알뜰살뜰 가꾸어 놓은 좌천역……. 이곳에선 달음산도 가깝고 임랑해수욕장도 가깝다.

 

기차가 서지 않는 서생역

월내역과 남창역 사이,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서생역이 있다. 울산옹기박물관, 진하해수욕장에 들렀다가 서생포왜성을 탐방하고 오는 길에 예정에 없이 들렀다. ‘서생역’이라 적힌 녹슨 철 구조물 간판이 그곳에 서생역이 있었음을 일러준다. 간이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 역엔 두어 채 있는 민가에서 몇 발자국 앞으로 기차가 지난다. 역사도 없고, 역무원도 없다. 인적 끊긴 휑한 간이대합실엔 썰렁한 바람이 머물고 마른 낙엽만 뒹군다. 기차 소리를 평생 듣고 살았다는 할머니 한 분이 대합실 주변에 쌓인 낙엽을 기역자로 허리 접어 쓴다. 이런 모습도 철길이 있어 하나의 그림으로 눈에 담긴다. 이런 역에서는 낡은 역 표지판 옆에 서서 달리는 기차의 창밖 풍경으로 손 흔들고 싶어진다.

철길 바로 아래, 낡은 양옥 2층에 붙은 색 바랜 ‘도미다방’이란 글씨마저 정겨운 서생역.

 

빠른 철로에 조는 손님아

이 시골 이 뎡거장 행여 이즐라

한가하고 그립고 쓸쓸한 시골사람의

드나드는 이 뎡거장 행여 이즐라

 

김영랑의 이런 시가 생각나는 역…….

 

  옹기마을이 가까운 남창역

 

기차는 다른 구간에는 없는 터널을 두 개나 지나고서야 남창역에 들어선다. 기차여행을 하며 역전마다 장이 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창·덕하·호계·경주·안강역 주변에는 지금도 장이 선다. 남창역에서 내린 것이 두 번째다. 처음엔 외고산옹기 마을에 가기 위해서였고, 이번엔 남창 오일장에 갈 목적이다. 3·8장인 남창 장은 부전시장 규모의 시장을 칸막이 없이 펼쳐놓은 듯 넓다. 없는 물건이 있을까. 의류며 생선과 육류, 건어물과 약재, 곡식과 채소를 비롯해 시장 명물인 뻥튀기며 냉국수, 돼지 국밥 등등. 100년 가까운 전통의 이 장에는 먼데서도 기차를 타고 와 전을 펼치는 장꾼이 많다. 20리 밖에서 왔다는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한테서 토실한 영천 생땅콩을 사고, 기장에서 온 아저씨 가게에서는 통통한 쥐포를 샀다. 점심으로 4천 원짜리 난전 냉국수를 먹고 역으로 돌아 나왔다. 시장 입구 천막집 뻥튀기가게 주인은 뜨거운 날씨에 개점휴업 상태로 올 때부터 낮잠만 자고 있다.

 

기와지붕이 고풍스러운 불국사역

 

경부선 직지사역이나 경전선 다솔사역처럼 사찰 이름을 딴 불국사역. 1시간 50분쯤 걸려 불국사역에 내리면 색다른 역 모습에 여행 온 실감이 난다. 기와지붕을 한 역 건물이 천년고도 경주답다. 여기서는 경주 시내 어디로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여름 기온이 강도를 슬슬 더해갈 무렵 힐튼호텔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박수근·이중섭 전’을 보러갔다 나오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후려치는 비에 대책 없이 운동화 속까지 흥건히 젖어 불국사역으로 돌아왔다. 역 앞 소문난 갈비국수집에서 갈비국수를 먹으며 옷이 젖은 줄도 잠시 잊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잔치국수에 곁들여 나오는 야들야들한 양념갈비구이는 자칫 서운할 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 밥때엔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야 할 만큼 손님이 몰리는 이곳을 맛의 집으로 추천한다.

불국사역이지만 불국사가 그리 가깝지는 않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면 20분여 걸린다. 도심에서 다소곳이 물러앉아 처음 봐도 소꿉친구의 고향 집처럼 푸근한 불국사역!

 

성동 시장 앞 경주역

 

부산에서 경주까지 승용차로야 한 시간 거리다. 그러나 눈과 가슴이 시원해지는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동해남부선을 타면 된다. 친구와 동행한 날, 경주해장국을 먹으려고 팔우정삼거리로 가는 길을 행인에게 물었는데 길안내뿐 아니라 음식대접까지 푸짐하게 받았다. 이런 뜬금없는 마주침이 여행기분을 한껏 부추긴다. 역 앞으로5분여 걸어가면 팔우정삼거리가 나오고 그곳에 해장국거리가 있다. 경주 별미인 메밀묵콩나물해장국을 파는 식당이 밀집해 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고 메밀묵과 콩나물, 해초류로 끓여 그 맛이 맑고 개운하다. 자투리 시간이 나면 역 건너 성동재래시장을 돌아보자. 물론 저녁 장을 미리 봐서 기차를 타는 것도 무한자유 아니겠는가. 그러나 경주에 와서 역사의 흔적을 탐방하지 않으면 헛배 부른 거나 다름없을 터. 버스로 갈아타고 남산 삼릉 쪽으로 올라 산에 널린 불교유적 군을 탐방하고 돌아와도 충분하다. 혼자서면 어떠랴. 이웃 동네 마실 가듯 경주 가는 기차에 훌쩍 앉아보자.

 

칸나 꽃 붉게 타는 안강安康

 

편안하고 편안하다는 안강역은 그 이름에서 간이역 느낌이 물씬 난다. 역무원 없는 역에 하루 두어 번 완행열차가 저 혼자 서고 떠나는 역 같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그만 길이 끝나버린다. 순간 당황스러운데 저만치 높은 곳에 ‘안강역’이라는 간판이 조그맣게 보인다. 길이 끝난 게 아니라 목적지에 다다른 거였다. 2층 대합실로 올라가니 밋밋한 외관이 무색하게 기차역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막 비질한 오래된 한옥 마당에 들어선 듯 내부가 정갈하다. 여러 역의 승차장을 가보았지만, 이곳만큼 기찻길이 놓인 풍경이 잘 어울리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철로를 따라 새빨간 칸나 꽃이 태양에 맞서 정열을 발산하고 있다.

안강 장날인 4·9일을 비켜서 인가. 마침 대합실이 비어 있어 역무원에게 말 걸기가 수월하다. 최용석 역장은 질문에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남창 장날의 붐비던 남창역이 생각나 “이곳은 한가하다.”라고 말을 건네자, 이곳도 장날이면 그만큼 붐빈다고 말한다. 남창 장보다 세배는 클 거라니 슬몃 궁금해진다. 기차가 지금은 하루 2회 운행하지만, 한때는 8회나 운행할 만큼 이용객이 많았단다. 30년 전 안강역에 근무할 당시 하루 이용객이 삼천 명에 달했다며 머나먼 전설처럼 얘기한다. 통학생을 비롯해 장을 보러 가거나 장을 펼치러 가는 이들로 기차역은 늘 붐볐다고. 역의 역사에 그의 이름도 기록되어야지 싶었다.

경주양동민속마을이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바로 차를 몰아 양동마을도 돌아보았다. 가보고 싶었던 곳을 이렇게 느닷없이 가게 될 줄이야. 바로 자유로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이날 오천 원짜리 갈비국수를 먹으러 굳이 불국사역으로 향했다.

 

동해남부선 종점 포항역

 

드디어 종착역이다. 동해남부선을 제대로 둘러보자고 시작한 여름이 벌써 저만치 물러갔다. 종점이라는 말이 꽤 낭만을 부추긴다. 이제 발길을 어디로 향할까. 죽도시장, 구룡포, 보경사……. 선택은 자유다. 여기는 동해남부선이 끝난 곳. 일단 역 앞 광장으로 나간다.

무수한 삶의 시간을 켜켜이 안고 동해남부선 기차는 오늘도 무던히 철길을 달린다. 기차 좌석에 앉아 열차 바퀴가 레일에서 꿈틀하며 움직이는 순간을 느껴보았는지……. 무시로 동해남부선 기차에 오를 때『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씌어졌다.…… 혼자만의 여행은 모든 점에서 내 창작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