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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화』

그리운 花浦

by 서정의 공간 2015. 7. 24.

 

 

<여행작가> 2015.9/10월호

순천특집

 

 

 

 

그리운 花浦

 

 

 

 

 

순천시 별량면 학산리 화포花浦. 이 꽃 피는 작은 포구에 조수처럼 내 마음도 무시로 드나든다. 그곳에 살던 친구는 태평양을 건너가 버렸지만, 마음속 화포에는 여전히 그 친구가 살고 있다. 그 화포를 지난겨울과 봄에 다녀온 후, 비오는 여름에 다시 찾았다.

 

순천만 갈대밭 표지판을 지나쳐 달리다 상림사거리 쌍림2교를 건너면 화포해변 4km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부터의 길은 녹색 들판에 눈까지 푸른데, 마른 바다가 좌측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광활한 뻘밭이다. 만灣이 형성된 모양 따라 구불구불 왕복 2차선을 달리는 학산리 해안 길. 물고랑이 갯벌의 핏줄처럼 꼬불꼬불 이어진다. 이곳에 해가 뜨거나 지는 풍경을 보려고, 또는 카메라에 담으려고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그러나 호젓한 길을 따라 해안 깊숙이 가보지도 않고 입소문 따라 짱뚱어전골이 별미라는 전망대가든에서 대부분 주저앉는다. 조금 더 가다 바다를 마당으로 끼고 자리한 아담한 우명마을로 내려가 보라. 좁은 마을 길을 지나면 바다를 목전에 두고 남도삼백리길을 안내하는 푯말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해안 끝 화포마을까지 1.1km. 바다를 발치에 두고 걷는 이런 신작로에서는 제발 걸어가 보라고 당부한다.

 

화포에 다시 간 날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유독 색이 짙은 해돋이를 향한 꿈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당연히 일몰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어디 해가 있어야만 풍경이랴. 비가 내리면 또 그대로 빗방울 떨어지는 고즈넉한 갯벌 운치가 그만인 것을.

 

지난가을 인근 펜션에서 선잠을 자고 여명에 바다로 내려갔을 때, 바다엔 정적이 감돌았다. 새파랗게 세상 윤곽이 드러날 때쯤에야, 어마어마하게 펼쳐진 갯벌을 보았다. 바다는 없었다. 그날, 세상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는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가슴에 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 모두를 품어 화살기도를 하게 하는 위력에 순응했다. 초겨울 찬 기운이 스르르 풀리고, 개흙이 말라붙은 널이 바다 어귀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있었다. 바닷물이 괸 작은 웅덩이마다 빨갛게 해가 고여 눈을 찔렀다. 동백꽃보다도 붉은 해를 평생 보고 살았을 화포 사람들 가슴엔 불순물이 들어앉을 새가 없을 것 같았다. 미끌미끌한 갯벌이 햇살 세례를 받아 벌겋게 물드는 그 앞에서, 나는 막막함 같은 것을 느꼈다. 누구나 같은 마음이 되는 건지. 곽재구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순천만의 노을이 하늘만 다 채운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단견이다. 노을은 땅 위에도 진다. 땅, 정확히 표현하자면 개펄이다. 개펄 위에 노을이 살아 뜨는 것이다.(‘포구기행’ 중)

 

해안에 몸을 뉘고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널과 뻘배가 여름비에 젖고 있다. 비옷을 입고 화포선창에서 통발을 손보던 마을 주민 임동기(55세), 차순심(56세) 부부를 만났다. 옆에서 구경하다 말을 걸고는 한참 수다를 떨었다. 순천에서 살다 장모를 모시려고 화포로 들어왔다는 임 씨, 넉넉한 마음처럼 바다 볕에 그은 모습이 훈훈하니 남자답다. 칠게, 맛, 꼬막이 수입원이며, 통발 속에 눈먼 낙지며 주꾸미, 짱뚱어도 들어온단다. 월수입이 평균 잡아 200만 원은 된다는 부부 모습이 보기에 흐뭇하다. 그때 선창 아래 흙탕물 바다에서 퍼덕거리던 숭어 한 마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임 씨가 내려가 그물도 아닌 갈고리로 숭어 아가미를 낚아채 올린다. 날쌘 행동에 감탄하는데 그 큰 숭어를 가져가라고 건넨다.

 

화포 만에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자그마치 3km 밖까지 바다가 밀려난다. 갯벌이 황금 들녘으로 변하는 때, 이때 물이 너무 마르면 널이 밀리지 않는다. 갯벌이 어느 정도 물기를 머금어야 작업이 가능하다고. 마을에서 만난 한 노인은 평생 갯벌에서 캔 꼬막이 못되어도 웬만한 창고 하나는 채울 것이라고 말한다. 갯벌과 함께해 온 삶이 이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조개 캐서 자식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고 했다며 먼 갯벌을 망연히 바라본다. 볕에 그을고 굵은 주름이 골골이 진 그 얼굴이 꼭 갯벌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 눈빛에 바다가 담겼다.

 

꼭 새해 첫날 화포선착장의 해맞이 행사가 아니어도, 순천만 일몰 감상 목적이 아니더라도 학산리 해안을 찬찬히 둘러보자. 물 빠진 해안 언저리에서 순천만 광활한 갯벌 앞에 서서, 바다 건너 와온 마을 어디쯤을 망연히 바라보기도 하면서. 우명마을에서 화포까지 자분자분 얘기하며 걸어가다, 제 세상 만난 칠게가 바다를 탈출해 신작로를 가로지르는 그런 길. 화포 지나 해안 따라 한참 들어가다 마을을 두세 개 지나고 더 갈 수 없는 곳까지 가보자.

 

지는 해도 물고랑 반짝이는 넓은 갯벌 속으로 지는 곳. 하루가 남긴 일몰의 여운이 아직 바닷물 감겨있는 갯벌 위로 붉게 스며드는 화포花浦. 꽃은 없어도 그 이름은 붉다. 다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