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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화』

눈 덮인 한옥마을에 빠지다

by 서정의 공간 2016. 2. 23.

 

 

 

 

눈 덮인 한옥마을에 빠지다



눈은 기도의 응답이다. 뭇사람 가슴에 고인 염원이 하늘에 닿아 마침내 느낌표로 내려오는 눈. 그래서 눈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도 자세가 된다. 손만 모으지 않았을 뿐 가없이 쏟아지는 눈을 향한 말없음의 기도. 눈 입자가 소리를 흡수하여 사위엔 귀 먹먹한 적막이 고인다. 분잡한 마음도 어느새 고요해지고, 자신만의 깊은 눈 공간으로 침잠, 침잠한다. 그 안은 추억의 공간이며, 잡념 없는 순백의 세계다.

세상에 눈이라는 게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음악이 없으면 귀가, 눈이 없으면 영혼이 피폐해질지도 모른다. 하늘이 뿌리는 꽃잎처럼 내리는 눈, 그 눈으로 하여 곤궁한 삶의 실태에도 잠시 눈꽃이 핀다. 비록 잠깐일지라도 눈은 마음을 가없는 평안의 길로 이끈다.


지난 1월 전주에서 하얀 눈이 주는 축복을 원 없이 받고 왔다. 하룻밤 사이 전주 한옥마을은 새로 생겨난 작은 고을 같았다. 온통 눈에 덮인 채 눈부시게 하얀 자태를 하고선 밤새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했다. 그러나 하늘과 전주는 눈을 매개로 모의하여 빛나는 눈의 궁전으로 만들어놓았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며 전통과 풍류가 공존하는 전주의 한옥마을. 눈을 소복이 이고 나지막이 엎드린 듯, 조신하게 어른 앞에 앉은 듯 차분한 눈 풍경에 반 넋이 나갔다. 영하의 맹추위에도 가슴이 폴딱대고 고삐 푼 송아지처럼 눈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수필과비평> 세미나가 있던 전주의 밤. 엄청난 눈이 한옥마을을 덮었다. 십 년을 드나들어도 보지 못한 한옥마을 설경에 대책 없이 마음이 무너졌다. 새하얀 눈 이불을 덮은 마을은 골목 어디에 서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눈을 뗄 수 없을 비경을 연출했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마냥 걸었고, 사진을 찍었고, 세상살이의 걱정 따윈 잊었다. 해가 중천으로 올라 그 눈이 녹는 모양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이 녹기 전에 사진에 담아두어, 두고두고 이날의 정취를 기억하고 싶었다.


눈은 밤을 새워 내릴 기세였다. 함박눈은 최단시간에 정신을 해체시킨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도 원망도 그 앞에 풀어헤치게 자리 편다. 눈은 뽀얗고 길게 빗금을 그으며 쭉쭉 쏟아져 내렸다. 그 눈 속에서 누군가는 사색에 잠겼으며, 누구는 동심에 젖고, 또 눈 내린 날 헤어지거나 만난 인연을 떠올리고, 또는 아랫목처럼 푸근한 위안을 받았으리.

숙소인 르윈 호텔 앞 푸른 소나무 몇 그루도 두툼한 눈 뭉치를 소복소복 이고 가장 먼저 반겼으며, 나뭇결이 아름다운 게스트 하우스 ‘전망’도 목재 색과 하얀 눈이 조화 이루고, ‘황손의 집’으로 가는 긴 흙담도 뽀얗게 솜이불을 덮었다. 골목에 선 자동차는 창문 하나 빠끔하게 남기고 눈에 파묻힌 눈뭉치가 되었다. 치즈 가게와 수제 초코파이가 유명하다는 가게를 지나 전동성당으로 가는 길. 가로수는 말갛게 헐벗었는데 그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설국의 풍경을 선사한다. 그 가로수에 달린 청색 홍색 가로등 색깔이 눈 속에서 유독 선명하다. 그뿐만 아니다. 어린이보호구역임을 알리는 운치 없는 간판도 이곳에선 거리의 샛노란 풍경이 된다. 저만치 100년 역사의 전동성당 뾰족 돔이 천상의 나라인 양 겨울나무 사이로 우뚝 솟아 기도의 응답에 손 모은다.


사실 살아가며 모든 일이 그렇듯 기대가 크면 실망도 쉬 따르는 법이다. 예견했더라면 눈의 감흥도 시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별 욕심 부리지 않은 데 대한 보답처럼 하늘은 깜짝 선물을 안겼다. 초저녁 때만 해도 기상예보와는 달리 눈은 아주 간간이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세미나 행사가 끝나가는 여덟 시 경부터 도시는 회색의 칙칙한 외관을 차츰 흰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던 거다. 때는 밤이 깊어갈 무렵이었으니 그 일은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실내에선 2부 행사로 들썩거리는 시간, 바깥엔 눈에 의한 눈의 역사가 쓰이고 있었던 거다.

오십 년 넘게 살아온 여자들에게 눈은 엄청난 위로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본연의 순수함은 그대로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여자들은 생전 처음 와 본 세상 같은, 눈이 연신 내리고 쌓이는 밤길로 나섰다. 어깨를 잔뜩 옹크린 채, 또는 털모자를 눌러쓰고, 더러는 눈밭에 드러눕기도 하면서. 어떤 지루한 삶이 현실에 닥쳐도 이렇게 정화되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작은 기운이마나 충전할 것 같다. 느닷없이 마음 설렐 일이 살아가며 몇 번이나 있을는지.

눈이 점령한 하룻밤이 지나자 도시는 눈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행사참가 차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마음까지 고립당했다. 눈 때문에 못 간다고, 눈을 탓하는 사람은 없다. 한 일주일은 아니더라도 하루쯤은 교통이 끊긴 곳에 고립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세상과 연결된 휴대폰도 내려놓고, 오로지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 싶을 때다. 각자 시간 빠듯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이 쉴 날은 그럴 때 밖에 더 있겠는가. 그 짧았던 하얀 밤의 선물은 엄청났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두고두고 추억할 촘촘한 시간을 안겼으니 다 눈이 준 선물이다.


눈이 내릴 때는 눈 내린 후의 교통 불편까지 생각지 않는다. 하얀 눈처럼 순수해지고 싶다. 다음날 있을 문학기행도 취소되었다. 취소되어 아쉬운 게 아니라 이야말로 금상첨화의 선물이었다. 그 덕분에 눈이 만들어놓은 한옥마을을 다리 뻐근하게 걸어보며 샅샅이 돌아볼 수 있었다. 장담하건대 차후 몇 해는 계절 상관없이 입에 올릴 눈의 추억거리가 될 거라 확신한다.

해마다 1월 세미나 때면 으레 오는 전주의 변신은 완전 성공이었다. 그 설국에서 마주한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 오간 눈빛과 눈짓, 긴장 풀린 마음도 그랬다. 마음의 순수에 가장 근접했던 시간. 여자의 변신만 무죄가 아니라 마음에 담은 그리움도 무죄다. 회상 속 그 밤엔 여전히 눈발이 그치지 않고 내린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다 괜찮다, 괜찮다고 속삭인다.




‘괜,찬,타,…/ 괜,찬,타,…/괜,찬,타,…/ 괜,찬,타,…/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매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끼어 드는 소리.…’............서정주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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