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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7회 기사- 가을터널을 지나는 중

by 서정의 공간 2018. 11. 17.






[감성터치] 가을터널을 지나는 중 /김나현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11-11 19:01:31
  •  |  본지 26면

     

     


   
읽던 책을 챙겨 기차를 탔다. 들고 있는 책을 마저 읽으려고 완행열차를 탔다는 어느 소설 속 문장에서처럼. 경주 통일전 앞 은행나무 가로수를 보러 가는 길이다.

순천 바람을 싣고 온 기차에 앉아 책을 펼치고선 첫 줄도 읽지 못하고 경주역에 다다른다. 줄곧 입석으로 온 중년 부부는 드디어 자리에 앉을 것이다. 저 먼 강릉까지 간다고 했다. 경주에서부터 좌석이 나는데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앉은 자리라고 한 말에 방점을 찍는다.

남창역, 경주 등지로 가는 등산객과 가을 구경나온 사람까지 더해 주말 완행열차는 만석이다. 지난여름, 어마어마했던 더위에 대한 보상 심리일까. 잠깐 사라져버릴 가을을 누리고 싶어서일까. 역 앞 광장에도 타고 내리는 여객으로 술렁댄다.

11번 버스는 경주 시내를 벗어나더니 이내 들녘을 달린다. 유채꽃밭의 화사함과 대비되는 농익은 황금색 들판이 수채화 화폭 같다. 불긋불긋한 벚나무 단풍까지 한데 어우러져 온통 천연색인데, 추수를 끝낸 논에 가지런히 누운 볏짚은 한 해를 갈무리하듯 차분하다.

통일전 앞 쭉 뻗은 가로수 길엔 노란 기운이 도는 담녹색이 주류다. 가을 운치로 이만해도 충분하지만 노랑나비 떼가 바람에 펄펄 흩날리는 장관을 상상한다. 같이 간 친구와 빨갛게 물든 벚나무 아래 잔디밭에 앉았다. 은행나무 길이 앞에 펼쳐진 자리다. 삶은 고구마를 먹으며 낭만도 식후경이라며 염치없는 식욕 핑계를 댄다. 가을 풍경화 속으로 웨딩사진을 찍는 남녀 한 쌍이 들어오고, 온 자연의 시선이 그리로 쏠린다. 하필 고구마를 먹을 때 오다니. 꾸역꾸역 먹는 모습이 부끄러운 계절 속에 있다. 그냥 가을볕만 쬐어도 배가 부르면 좀 좋으련만.

집 나가면 고생이라지. 하지만 산야가 가을 색으로 물드는 요즘은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갈 궁리로 분망하다. 뜨거운 단풍을 남기고 가을이 휙 스쳐 지나면 곧 겨울이 올 터. 산야를 누빌 여건이 안 될 땐 바닥에 뒹구는 낙엽이라도 밟으며 가을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날리는 속속 빗자루에 쓸리는 무미건조한 도시가 삭막한 시절이다.

단풍의 기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각자가 지닌 추억이 다르듯이. 단풍이 딱 절정인 시기에 어느 곳의 단풍을 봤는가가 이를 가늠할 거라 본다. 내 기억 속 단풍은 단연 양산 내원사 계곡에 머문다. 오래전 어느 소모임에서 가을 소풍을 갔다. 그곳이 불타듯 붉은 내원사 계곡 어디쯤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꺼내 보면 당시에도 감탄했던 빨간 단풍 속 한때가 저장돼 있다. 가을 단풍으로 누구는 내장산이 최고라고 하고, 누군가는 월정사를, 또는 송광사를 들먹일 것이다.

가을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나라 풍광은 반할 만한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사이트에 올린 계절 사진을 보면 감전된 듯 숨을 멈춘다. 사진으로나마 감상하며 아쉬움을 달래지만, 직접 보지 못하는 아쉬움만 더 키운다. 그러고 보면 국외만 찾을 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 산하라도 다 둘러보면 좋겠다는 꿈이 생긴다. 알록달록 꽃피는 봄이면 봄대로, 눈 내리는 겨울엔 설경으로 가슴이 뛴다. 그중에서도 한 해가 다 가는 쓸쓸함과 차분함이 섞인 추색(秋色)에 심정이 온전할 리 있겠는지.

통일전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열 몇 대는 되겠다. 다들 단풍 속으로 뛰쳐나온 게다. 때로 그 무리에 섞이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제약을 받는 단체 행동보다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발길을 택한다. 경주역 앞 성동시장에서 총각무 두 다발을 사서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가을도 제대로 무르익을 터, 들썩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다시 주말 기차표를 예매한다. 기필코 노랑나비 떼가 펼치는 군무를, 그 앞에서 하염없다든가 마음 저리다든가 하는 감정체험을 하고야 말리라.
누구는 대청봉에 올라야 한 해가 갈무리된다고 하더라만. 나는 경주의 가을을 보아야 오는 겨울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저 읽으려고 들고 간 책을 몇 줄도 읽지 못한 건 옷깃을 스치는 가을 탓이었다. 그 가을이 혼신으로 불타고 있다.

“먼 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 그렇게 눈멀어 /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이런 시가 생각나는, 바야흐로 가을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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