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은 소망을 싣고
김나현(수필가)
“맨 위쪽으로 걸어 주이소.”
“높은 데에 잘 달아 주이소.”
“잘 타게, 나무 뒤쪽으로 걸어 주이소.”
오는 이마다 같은 부탁을 한다. 저마다 표정이 간절하다. 진행요원은 일일이 가장 높은 데에 달아 주마고 걱정하지 말고 가시란다. 대보름 달집에 태울 것을 넣으려는 발길이 줄을 잇는 해운대백사장이다.
대보름 전에 소망 연을 달 수 있다는 말에 서둘러 왔다. 정월 대보름을 이틀 앞둔 해운대백사장엔 첨탑 모양 달집 마무리공사가 한창이다. 하여 시민들이 건네는 물건을 진행요원이 받아 달집에 거는 일을 대신하는 중이다. 직접 걸지 못하니 미덥지 않은지, 잘 걸어주겠다는 답변을 재차 듣고서야 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어찌 알았는지, 나이 지긋한 어머니들이 종이가방과 검정 비닐봉지 하나씩을 들고 달집 쪽으로 속속 들어선다. 뭘 태우는 거냐고 물으니 삼재에 든 가족의 속옷이나, 쓰던 염주 같은 깨끗이 태워야 할 도구라고 한다. 중히 챙겨온 액막이 옷이나 태울 물건들은 달집 안쪽 공간 나뭇가지에 걸렸다가 달집이 탈 때 불꽃으로 사라질 것이다.
어릴 적을 떠올려보면 설보다도 대보름 행사가 더 풍성했던 것 같다. 뒷집 친구와 해를 번갈아 가며 나눠 먹은 더위팔기, 다래끼 퇴치용 의식이며, 그해 운세에 따라 아버지가 만들어 준 액막이용 부적을 들고 뒷산에 올라 보름달에 빌기, 조리를 들고 집집이 다니며 가지각색 오곡밥 얻어오기….
아버지는 늘 상쇠 역이었다. 마을 장정들이 꽹과리, 북, 장구 같은 풍물을 선두로 집집이 돌며 지신을 달랬다. 이때 아버지는 한쪽 어금니를 앙다물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선두를 이끄셨다. 꽹과리 소리를 따라 풍악대가 골목을 누볐다. 집주인은 지신밟기로 연중 무사를 빌어준 이들에게, 깃대에 늘어뜨린 새끼줄에다 지폐를 끼워 답례했다. 악대를 졸졸 따라다니던 이런 풍속도 오래전에 사라지고, 꽹과리가 손에 익었던 아버지도 세상에 안 계시다. 정월대보름 맞이 달집 앞에 서니 아버지가 부쩍 그립다.
비치된 기원문 종이에 가족 이름과 소망하는 바를 일일이 적어 달집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주변을 서성댔다. 사람들은 어떤 간절함을 품고 왔을지. 볼펜을 든 그들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보니 하나같이 처음 쓰는 글자가 건강이다. 가족건강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공통되고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대부분인데 젊은이도 간혹 섞였다. 젊은 사람이 쓰는 소망은 간단하고, 어른들은 구체적인 문장으로 쓴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한 어른은 한참을 엎드려 쓰고 있다. 뭘 그리 쓰느냐고 물으니 자식이 많아 쓸 게 많다며 두 장째 적는다. 들여다 본 소망은 가족건강, 안전운전, 사업번창, 합격기원, 만사형통, 학업성취 등이 주류다. 거창하지도 않고 누구라도 한두 개쯤 해당할 소박한 바람이 담겨 있다.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모으는 이, 소원 성취함에 지전을 넣으며 절하는 이, 달집 향해 허리 굽히는 이…. 달집 속 넓은 공간은 이런 소망으로 곧 가득 찰 것 같다. 활활 타는 달집과 함께 이들의 기원도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를 것이다. 휴일임에도 속속 찾아오는 어머니들을 보니 왜 그 자식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주름진 얼굴마다 그 자식들이 비친다. 자나 깨나 안중에 두는 건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그 자식들일 것이다. 자식만 건강하고 잘된다면야 하는 마음을 이곳에서 본다.
달집을 짓는 백사장은 이미 대보름 분위기다. 달집을 태워야 봄도 오고 꽃도 필 터. 모든 액은 거둬가고 원하는 바는 불꽃처럼 화하기를, 달집 앞에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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