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2017년 11월호
절해고도 302
세상이 한증막이다. 생각마저 멍하게 만드는 이 폭양 사태는 희한하게도 적막을 동반한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고요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때 따르는 물리적 현상인 줄 알았다. 함박눈은 눈의 숭숭한 결정체가 소음을 흡수하여 그렇다지만, 데운 가마솥 같은 열기가 소음을 흡수할 리는 없을 터. 요는 지상을 질식시킬 작정으로 쏟아붓는 더위에 모든 생물이 풀 죽은 결과일 것이다.
이런 폭서에는 스스로 살아남을 지혜를 발동해야 하는 법. 나는 세상으로부터 숨기를 택했다. 나만의 절해고도로 피신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오롯한 나만의 공간, 아니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사람 사이 관계마저 단절시킨 끔찍한 열기를 피해 칩거한 외딴곳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이따금 정에 목마르면 밀폐한 공간의 봉인을 해제하고 외부로의 길을 튼다. 목까지 찬 답답함은 환기를 간절히 원했다. 바깥 공기는 달되 뜨겁다. 다시 문에 문빗장을 건다. 혼자 먹고, 혼자 말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자다가 텔레비전을 켜고 멍한 시간을 보낸다. 어찌 보면 이곳은 나만의 왕국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책상 위에 수두룩이 재인 읽을거리가 줄어들고, 창작 스케치용 대학노트가 쓸거리로 술술 채워진다면 말이다.
지구 환경이 지진이거나 홍수 아니면 가뭄처럼, 양극을 치달을수록 사람도 극 개인주의로 내닫는 것 같다.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도 타인의 간섭을 사양한다. 나도 그런 시대의 일원이라서 인가. 적막이 깔린 절해고도에서 숨 쉬는 건 오직 나뿐. 둘러친 벽 안쪽 나와 그 너머의 사람들은 각각 별개의 존재다. 각각의 사람이 각 독립개체인 그냥 사물이다. 모르는 사람끼리 눈 마주치고 멋쩍은 웃음 한 번 짓기란 하, 떨떠름하기만 하다. 되레 계면쩍어 서둘러 돌려버리는 시선, 아니 세상이라니. 그 말 없는 미묘한 시간에 흐르는 애매한 분위기란 또 어떻고. 날씨로 인해 정의 교류마저 뚝 끊긴 바깥세상으로부터 한 번 더 차단된, 고립무원인 절해고도로 칩거해 있다.
김홍도의 <소림명월도> 속 적적한 운치를 그린다. 성근 나뭇가지 뒤로 동실 떠오른 달이 있는 그림은, 스산하고 소슬하다. 안개가 자욱이 감긴 그림 속으로 이끌리듯 스며든다. 어느새 청정함이 깃든다. 인문학을 강의하는 광고인 최갑수는 이 그림에서 베토벤의 <월광 1악장>을 떠올린다든가. 나는 한여름의 적막을 보고 있다. 풀벌레도 잠든 밤의 고요와 쓸쓸함을. 그리고 문득 나무 뒤로 뜬 뜨물 빛깔을 띤 보름달이 나라는 데에 생각이 이른다.
18세기를 살다간 동서양 예술가가 승화시킨 정적이, 21세기를 사는 나에게도 통했음일까. 나의 고도孤島에서 김홍도와 베토벤과 내가, 그림과 음악과 달로 만날 수 있다니. <월광 1악장>을 찾아 음미한다. 그림의 정갈한 운치를 휘감는 음률이 위리안치 된 내 영혼을 비단처럼 감싼다. 베토벤이 듣지 못하는 귀로 건반을 두드릴 때, 그의 영혼은 적막 속이거나 암흑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정상인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초월한 영감 속에 있었을까. 어쨌든 위대한 음악가와 화가와 그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문학인의 교감이다. <소림명월도>그림 자체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화폭 앞에 있는 한 고독한 화가를 떠올린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정서가 출렁인다. 더위 속에서 헉헉댈 땐 누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위안을 받고 있다.
‘햇볕이 숯불처럼 뜨거운’ 여름 한낮이다. 이 쨍한 순간을 꽹과리로 두드리듯 깨트리며 생을 다해 울어대는 매미 소리 왁자하다. 이는 고맙게도 숨 쉬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리다. 생에서 가장 뜨거운 순간을 보내는 매미와 극도로 무력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나 사이로 여름은 지나가고 있다. 때가 되면 소슬바람은 절로 불어올 것이며, 차츰 성글어지는 숲 사이로 뜬 달도 곧 볼 수 있을 거다. 희망의 끈을 손에 움켜쥔다.
누구는 ‘바다’로 피신 가 있다고, 누군가는 먼 휴양지에 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듣는다. 하여 더 갑갑한 시절이다. 그런데도 방해받지 않고 내일을 기약할 공간이 있으니 감사하다. 맘껏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충분히 고독 속으로 침몰하여 그 고독을 만끽할 수 있음도. 온전한 하루를 자신에게 쓸 수 있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위리안치가 썩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살다가 가끔, 얽히고설킨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자신에게 집중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어쨌든 302호 문 닫아걸고 붓방아 찧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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