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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화』

경북을 거닐다 2-계절이 흐르는 경주 통일전 앞

by 서정의 공간 2020. 1. 7.




  

경북을 거닐다-

계절이 흐르는 경주 통일전 앞

·사진 김나현

 

어떤 곳이 멋있어 보인다는 것은, 그곳이 자신의 것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임을 알았다는 어느 여행자의 글을 읽은 적 있다. 이는 곧 그 나라만의 것, 그곳만이 지닌 오래된 것들이 그곳을 그곳답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오래된 것이 지닌 편안함과 푸근함을 지닌 곳이 경주가 아닌가 한다. 부산에서는 거리가 가깝기에 바람 쐬고 싶을 때면 훌쩍 동해남부선 기차에 앉곤 한다. 어느 역에서 내려도 그 역만의 운치가 있는 노선이라 경주역, 불국사역, 안강역 등 마음이 닿는 곳에서 불쑥 내리곤 했다. 천년고도 경주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경주는 자긍심과 아끼는 마음을 동시에 갖게 하는 도시다. 이런 경주로 계절이 바뀔 때면 달려가곤 한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옷을 갈아입는 11월 둘째 주쯤이면 경주 통일전으로 간다. 시원하게 뻗은 노란 가로수 사이로 영화 장면처럼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고 있노라면 그제야 가을을 본 듯 충만해진다. 가을맞이가 아니라 가는 가을을 눈에 담고 배웅한다는 게 맞겠다.

가을 색이 짙은 어느 날도 읽던 책을 챙겨 기차를 탔다. 들고 있는 책을 마저 읽으려고 완행열차를 탔다는 어느 소설 속 문장처럼, 책 한 권을 들고 통일전 앞 은행나무를 보러 간다.

 

먼 순천 바람을 싣고 온 기차에 앉아 책을 펼치고선 첫 줄도 읽지 못하고 경주역에 다다른다. 남창역과 경주 등지로 가는 등산객과 가을 단풍 구경 나온 사람들로 주말 완행열차는 만석이다. 서서 가는 사람도 기차간 여기저기에 보인다. 더위를 잘 넘긴 데 대한 보상 심리일까. 찰나에 스쳐갈 가을을 눈에 담고 싶어서일까. 기차역 광장은 드나드는 여객으로 술렁댄다.

역 앞에서 길을 건너 탄 통일전 방향 11번 버스는 시내를 이내 벗어나 들녘을 달린다. 농익은 황금 들판이 거대한 수채화를 펼쳐놓은 듯 황홀하다. 세포마다 층층이 차별화되어 물든 벚나무 단풍까지 어우러져 창밖 대지는 총천연색 파노라마다.

 

통일전에서 하차하며 가로수 길부터 눈을 맞춘다. 이곳 은행나무 단풍은 11월 첫째 주 지날 때쯤이 절정이고, 둘째 주는 은행잎이 어느 정도 떨어져 바닥에 푹석하게 깔리는 정도고, 셋째 주는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져 스산하다는 걸, 가 본 경험으로 안다. 녹색이 덜 퇴색된 상태로도 풍치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나부낄 때 그 진가를 제대로 보는 기분이다.

한데 단풍 절정의 시기가 그해 날씨 따라 다르기에 초록색이든 노랗게 물드는 중이든, 통일전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가을바람을 쐬는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같이 간 친구와 낭만도 식후경이라며 챙겨온 커피며 비스킷을 먹는다. 평온한 가을 풍경 속으로 웨딩사진을 찍는 남녀 한 쌍이 들어오자 온 자연의 시선이 그리로 쏠린다. 우리도 가을 속 한 풍경이 되리라 믿어 마지 않으며 느긋하게 가을볕을 쬔다. 평온한 이런 시간 속에서는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가을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나라 풍광은 반할만한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사이트에 올린 계절 사진을 보면 국외만 찾을 게 아니라 우리 산하라도 다 둘러보고 싶다는 꿈이 생긴다. 사계절 중에서도 한해가 내리막길에 든 쓸쓸함과 스산함이 섞인 추색(秋色)을 접하면 당장 가방 챙겨 길 떠나고 싶어진다. 그럴 때 두말없이 달려오는 곳이 경주다.

통일전 주차장은 각지에서 등산객을 실어 온 관광버스들로 마치 차고지 같다. 버스에 타고 온 이들은 가을을 더 가까이 느끼려고 산으로 단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칠불암 일곱 돌부처를 만나는 복도 누릴 테니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물론 칠불암까지 갈 수 있지만 목적지가 통일전이기에 이곳에 있는 것으로도 충만하다.

누구는 가을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야 한해가 갈무리된다고 하더라만, 나는 경주의 가을을 보아야 제대로 본 기분이 된다. 노랑나비 떼가 쏟아져 내리는 장관을, 그 앞에서 하염없다든가 하는 막막함을 체험하러 가을이 깊어갈 때면 경주행 주말 기차표를 예매하곤 한다. 비록 마저 읽으려고 들고 간 책을 한 줄도 읽지 못해도 괘념할 것 없다.

 

겨울 들머리는 잎을 다 떨어낸 은행나무가 유독 앙상해 보일 때다. 불볕더위 고비를 연거푸 넘으며 지칠 즈음, 절기가 바뀌고 단풍에 취하는 낭만도 잠시. 한 해가 다 이울었다는 서글픔이 밀려들 때 황금빛 자존감을 바래지 않은 채 겨울을 맞이하는 은행나무.

은행 단풍이야 가까이 범어사 설법전 사리탑 옆 노목부터, 부전시립도서관 앞 낙엽축제가 열리는 은행나무 길, 밖으로는 동해남부선 기차가 정차하는 좌천역 철로에 가을 연서 같은 은행잎을 쏟아 붓는 몇 그루, 쌍계사 금당을 환히 비추는 우람한 은행나무도 있지만, 경주쯤은 가서 지나가는 가을을 만끽하고 싶어진다.

은행나무 둥치에 노란 단풍이 소복이 덮인 채 겨울이 깊어간다. 생명이 태동하는 봄도 머지않을 터. 그땐 단풍 이불 거름 삼아 진녹색 잎이 초록 나비처럼 나풀대는 장관을 담으러 또 통일전으로 달려갈 것이다.














 

약력

수필가, 수필과비평등단, 여행작가, 여행문화등단

수필집 다독이는 시간2, 수필선집 풍경 한 폭

국제신문 오피니언 칼럼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