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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감성터치] 천년을 꿈꾸는 마애불

by 서정의 공간 2023. 7. 10.

[감성터치] 천년을 꿈꾸는 마애불

  • 입력 : 2023-07-09 19:51:12
  •  |   본지 22면

  

뻐꾹 소리 낭랑한 산자락에 독경 소리 흐른다. 적요하던 절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가풀막진 산길을 숨차게 올라 다다랐을 때 들리는 기척이 반갑다.

보광전 앞에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하다. 스님은 보이지 않고 엎드린 보살 등만 보인다. 실은, 법당에 모신 부처보다도 어마어마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마애불을 보러 왔다. 여남은 해 전쯤, 나를 보고 환히 웃던 마애불 꿈을 꾸고 문학상을 받은 적 있다. 이후로 마애불을 보면 가까이 다가가 표정을 살피곤 한다.

마애불 29위가 굽어보는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관세음보살과 미륵존불을 정면에 두고 여자 두셋이 정좌했다. 단 아래에는 나이 지긋한 여자가 독경 따라 조그만 크기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 짬 날 때를 기다려 무슨 기도인가 물었다. 초하루 사시예불이라고 설명한다. 불자가 아니라서인가. 용어가 생소하다. 피부색이 다른 젊은 남자 둘이 앞쪽 가파른 계단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본다. 이런 한갓진 데를 어찌 알고 찾아왔을까. 그들도 마애불군이 에워싼 분위기에 압도된 걸까. 언뜻 보니 몸가짐이 조신하다.

주소가 만덕고개길인 이 절은 창건 연대가 1927년(안내판)이다. 불상은 시일이 더 지난 1950~1960년대에 조성했다. 보통, 마애불 조성 시기가 이 정도면 역사로 쳐주지도 않는다. 경주 남산골 일원에 널린 불상이나 마애불 연원이 신라 시대임에 비하면, 여긴 아직 돌가루 냄새도 가시지 않은 갓 조성한 거나 다름없다.

기백 년 세월이 묻지 않으면 무시하던 사고를 바꾸어 놓은 곳이다. 이사 온 후 뒷산에 올라갔다가 탐방차 방문했을 때, 보광전 대웅전을 지나 돌계단 몇 개를 오르자 믿지 못할 광경이 열렸다. 목을 꺾어야 눈이 닿는 어마어마한 바위벽이 둘러쳤는데, 그 바위벽에 돋을새김한 불상이 빼곡하게 들어선 게 아닌가. 얇은 역사라고 가벼이 보던 심보며, 어느 시대에 어떤 고승이 창건했고, 어떤 설화가 전하며….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역사로 치던 고정관념과 가치관이 흔들렸다.

시간이 흐르면 이곳도 역사가 될 터. 현대에 조성했다고 불심이 얕거나 가볍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지금도 시간은 흘러 어제를 낳고 있다.

우람하고 호기 넘치는 사천왕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그 뒤 바위 중턱쯤에 앉은 석가모니불, 나한…. 무엇보다 정면 중앙에 선 11면 관세음보살의 정교한 새김과 수려함이라니. 앞쪽 가파른 계단을 올라 뒤돌아보는 마애불은 또 어떤가. 볕을 받은 한 분마다 표정과 윤곽이 도드라진다. 이 섬세한 표정을 만든 이는 한국전쟁 때 피난 온 불교 조각 장인이란다. 수직 바위 면에 이들을 새기게 한 불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가끔, 만덕고개 남문 가는 길에서 갈라지는 산허리로 접어든다. 쾌적한 산책길이라 자주 찾는 길이다. 이 중턱길이 끝나면 오르막 포장길이 능선이 가까운 절까지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몇 번은 작정해야 한 번쯤 올라가는 길이다. 정신과 사회가 혼돈이었을 일제강점기에 수행 차 또는 대중 교화목적으로 창건하고,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마애불군을 모신 절. 만덕에서 상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자리해 건너편 산에서도 등산객이 합장하는 절. 용선선사는 어떤 혜안으로 이곳에 절을 앉혔을까.

볕만 머무르던 절 마당에 모처럼 발길이 오간다. 음식 냄새에 빈속이 울컥 요동친다. 공양간을 빤히 바라보며 지나자, 보살이 간절한 눈빛을 읽은 듯이 공양하고 가라고 부른다. 재바르게 몸을 돌려 공양간으로 들어서니 등산복 차림 객들이 네모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다. 양손에 비빔밥과 시래깃국을 들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까 본 외국 남자 둘이 서먹한 표정과 몸짓으로 공양간에 들어서고 있다. 절밥까지 먹고 간 그들에게 한국 절은 마음에 깊이 남을 것 같다.

 
11면 관세음보살 위쪽에 좌정한 미륵존불 미소도 챙겨보자. 숨차게 깔딱 고갯길을 오른 보상이 될 터. 1000년을 꿈꾸는 마애불군이 있는 이곳은 범어사 말사인 석불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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