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의 기억
-Gloomy Sunday
존엄 없이 사는 것보다, 존엄 속에 죽는 것이 낫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원작소설『글루미 선데이』가 전하는 울림이다.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 전쟁 동맹국인 독일은 헝가리를 점령했고, 부다페스트를 주둔지로 삼았다. 군사들은 폴란드로 진군하는 것과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먹고살지를 고민했다. 우월한 게르만족, 승자들은 그러했다.- ‘작가의 말’에서
‘글루미 선데이’는 헝가리 가수 레죄 세레스가 작곡한 곡으로 당시 많은 청년이 이 노래를 듣고 자살했다고 한다. ‘자살을 부르는 노래’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원작자인 니크 바르코프는 이 노래를 모티브로 부다페스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한 유대인과 피아니스트에 대한 소설『우울한 일요일의 노래』를 펴냈다. 그 후 독일의 롤프 쉬벨 감독이 소설을 바탕으로 동명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뭔지 모를 걱정거리에 잠긴 기분이 된다. 물론 자신도 채 느끼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지속이다. 사랑과 죽음과 전쟁이 한데 얽힌 영화 전편에 깃든 애수 때문이랄까. 영화에서 벗어나고서도 한 며칠은 여운이 이어진다.
영화는 나치가 점령한 부다페스트에서, 정확히는 부다페스트 14구역에 자리한 레스토랑(군델 레스토랑, 헝가리식 팬케이크 초콜릿 팔라친타로 유명함)에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을 그려낸다. 여자는 두 남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는 셋이다. 감정적으로 아슬아슬한 장면이 당시 헝가리 역사에 곁들여 긴장의 끈을 잇는다.
이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부다페스트로 달리는 버스에서 감상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전에서 클림트의 ‘키스’를 만난 감흥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다. 이후 귀국해서도 부다페스트와 ‘글루미 선데이’는 직결된다. 부다와 페스트 지구 사이로 흐르는 두나(다뉴브)강도 포함된다. 그 강에 처음으로 놓인 세체니 다리도 영화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길 위에서 사연이 엮이면 그곳에 사연이 덧대어 내내 회자하게 되는 것 같다. 부다페스트에 다녀온 후 그곳은 ‘글루미 선데이’의 도시로 기억된다.
영화엔 ‘우울한 일요일의 노래’ 단 한 곡이 흐른다. 이 한 곡이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선율에 깔린, 분리할 수 없는 성격 같은 우울함이 흐르는 영화를 집에 와서 다시 보았다. 영화의 본국에서 봤던 느낌은 일상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깊은 사연을 간직한 여인처럼, 영화는 아름답고 또 슬펐다. 반복되는 선율이 강한 이끌림으로 스며들며 영화의 몰입을 배가한다.
헝가리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공존하며 독일이라는 폭력 앞에 일상에 두려움이 깔려있다. 아름다운 여인 일로나를 둘러싼 두 남자의 사랑, 그러나 여자는 두 남자를 다 사랑하기로 한다. 역사의 격동 속에 일로나에게 욕망을 품은 독일군 대령까지 끼어들고. 어쨌든 주인공 일로나는 세 남자의 죽음에 본의 아니게 관여한다. 한 남자는 아우슈비츠에 보내졌으며, 또 한 남자는 여자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 자살한다. 자신의 생일에 취했던 여자, 그 여자가 사랑한 남자를 아우슈비츠 목욕탕으로 들여보낸, 독일군 대령이 되어 돌아온 한 남자는 자신의 생일에 그녀에게 복수 당한다. 독살당한 것이다. 아우슈비츠로 간 남자가 운영했고 지금은 여자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어쩌면 여자가 평생을 기다려온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도입부터 단조로운 단조 선율 속에 세체니 다리가 등장한다. 어쩐지 사연이 있을 것을 예고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부다페스트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 영화를 못 본 채 거기에 갔다. 자막이 올라가기 전까지 화면을 채우는 두나 강변의 노을 깔린 풍경과 세체니 다리는,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시처럼 마음이 그곳을 서성이게 한다. 화면이 덜어지며 멀리 보이는 부다 왕궁도 영화와 세체니 다리의 분위기를 증폭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영화와 여행의 여운을 지속하고 싶어 원작을 사서 읽었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는 이야기 전개와 등장인물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서로 다른 장르로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건, 영화를 본 후 원작을 읽건 둘 사이의 괴리는 필연적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원작은 영화만 한 감동은 없다. 그러나 자보와 비크라는, 악연이자 라이벌인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전후 독일 사회를 비판한다. 이는 반세기가 지난 2차 대전의 폐단이 현대사회와 그 의식에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시대 비판이며 경종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세 번째 개봉할 만큼 정서에 부합하는 영화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건국 천 년을 넘어선 헝가리와 수도 부다페스트. 그 오랜 역사도 내겐 달콤하고 우울한 ‘글루미 선데이’에 묻힌다. 인생을 짧지만 예술은 역시 길다는 말에 동의한다.
-다뉴브 강의 잔물결
부다페스트에서 묵은 숙소는 강가에 있었다. 다뉴브(영어)로, 도나우(독일어)로, 두나(헝가리)로 불리는 강을 눈앞에 두고 몹시 설렜다.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애수 띤 음률이 강 위로 흐르는 듯했다. 저 사연 많은 ‘사의 찬미’도 뒤따랐다.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는 ‘다뉴브 강의 잔물결’ 멜로디를 가져다 썼다. 김우진과 윤심덕이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며 죽음으로 영원을 맹세한 노래.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어쩐지 선율이 귀에 익다 싶었다. 어쩌면 두 곡을 들은 순서는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연처럼 물결도 가라앉은 잿빛이었다. 다뉴브 강을 노래한 또 다른 곡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탁류였다. 사실 이 제목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서 붙인 게 아니라고 한다. 공연일이 되기까지 이 곡에 제목을 붙이지 못하다 문학가가 쓴 한 표현을 차용한 거였다고. 실제 독일에서 발원한 도나우 강이 석탄재나 중금속 오염이 심각하다고 하니 흐린 강은 날씨 탓이 아니었던 게다.
부다페스트엔 언덕인 부다 지구와 평지인 페스트 지구 사이로 두나 강이 흐른다. 슬로바키아에서 흘러와 부다페스트를 지나 긴 여정 끝에 흑해로 흘러든다는 강. 그 강변을 걸어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당장 강변으로 달려나갔다. 강물은 흔한 물일뿐이다. 그러나 이름이 주는 감격에 겨웠다. 꼭 우리나라처럼 외침을 받고 받아 무려 7개국 국경을 접하게 된 나라에서 동병상련의 심정이 되었다. 돌고 도는 역사의 한 귀퉁이에 잠시 머문 시간이 아쉬웠다.
이 도시를 흐르는 강의 야경을 놓치면 안 된다. 다뉴브 야간 유람선을 타고 부다와 페스트 사이를 지날 때 보는 황금색 국회의사당은 찬탄을 자아낸다. 부다 왕궁과 이슈트반 대성당의 신비함과는 다른 웅장한 자태다. 네오고딕 양식의 국회의사당은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1885년에 착공해 17년 만에 완공했다는 곳이다. 국회의사당 앞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세체니 다리에도 알전구가 일제히 불을 밝혔다. 불 켜진 전구가 사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세체니. 이 다리를 지날 때 유람선에서 귀에 익은 음악이 울려 퍼졌다. 갑판에 올라 ‘우울한 일요일의 노래’가 아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왈츠를 들을 때 그곳에 있음을 실감했다.
사람마다 여행을 기념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자석기념품을 사는 편이다. 그러나 여행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게 하는 건 역시 그곳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한다. 내가 선호하는 건 자갈이다. 이 방식은 강이나 바다에 갔을 때 써먹는다. 잘 닳아먹은 자갈을 고른다. 모난 돌멩이가 동글동글해지고 부피가 깎이도록 그곳에 있었다는 뜻일 것이기에. 혹 이 방법은 위법이거나 자연보호 정신에 어긋날 수도 있다. 나도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그곳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보니 그렇다. 다뉴브 강변에서 자갈 세 개를 귀중품처럼 가방 깊숙이 넣어왔다.
그 자갈이 자그락자그락 소리를 낸다. 고향 강변에서 서로 부대끼던 소리였을 것이다. 참 멀리서도 왔다. 담갈색 자갈, 얼마나 닳았는지 차돌 같다. 물살에 쓸리고 쓸려 더 마모될 데도 없이 단단하다. 어쩌면 부다페스트가 존재한 때부터 함께했을 돌이다. 그걸 증명하듯 자갈 겉면엔 미세한 금이 거미줄처럼 그어있다. 손 안에서 서로 부딪는 소리가 청명하기 그지없다.
그 아침, 용처럼 꿈틀대던 하늘을 덮은 구름이며 잠시 지나간 빗줄기, 푸른 도나우는 없고 침침한 표정으로 굼실굼실 흐르던 강물과 서늘한 강바람까지… 자갈은 기억할 것이다. 불쑥 그곳이 그리울 때 다시 꺼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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