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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어떤 고해성사

by 서정의 공간 2017. 3. 21.





어떤 고해성사




                                                  

주님, 오늘도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영감님에게서 건네받은 연애편지를 부치지 않았거든요. 봉투에 붙인 우표도 얼른 떼 내어야 합니다. 풀이 말라버리면 우표를 떼어낼 수 없어 다시 우체국에 사러가야 하니까요. 재사용한 우표를 영감님 책상에 도로 갖다 놓아야 제 임무가 끝난답니다. 왜냐고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봉투에 붙여야 하니까요.

‘보고 싶은 신남아, 너는 왜 연락이 없느냐. 전화번호를 까먹었느냐. 나는 날마다 네가 보고 싶은데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으냐. 우리 어서 만나서 예전처럼 연애도 하고 재미있게 지내보자.’

주님, 구구절절한 영감님 연모의 정을 어찌해야 할까요. 영감님은 내일도 신남 씨에게, 아니 제게 편지를 쓸 겁니다. 물론 그 편지가 우체통에 들어갈 거라 철썩 같이 믿겠지요. 주소지에 그녀가 아직 살고 있는지, 아니면 이사를 갔는지도 모른 채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 저는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을 수가 없답니다. 영감의 무서운 아들에게 우격다짐을 받은 때문이지요. 그 아버지를 돌보고 월급을 받는 방문 요양보호사인 저는 고분고분한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가 아니겠는지요. 먹고살자면 당연히 실세의 힘을 따를 수밖에요. 목구멍이 포도청인 제가 어른을 상대로 공갈쳤다고 벌이라도 내리실 건가요?

제 말 좀 들어보시지요. 저는 일상생활을 수행하기 어려운 노인들을 찾아가 신체와 가사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합니다. 다양한 노년을 만나지요. 그렇게 만난 영감님과 일이 이렇게 엮일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영감님은 젊었을 땐 한 자락 했을 풍채더군요. 기골을 보더라도 여자 꽤나 따랐을 법했지요. 그런데 구순의 문턱도 오래전에 넘긴 이 영감님이 목하 상사병을 앓는 중이랍니다. 지푸라기 잡을 힘만 있어도 이성이 그립다는데 우리 영감님의 원초적 본능은 참으로 꿋꿋하네요.

신남 씨와 오래오래 관계를 유지하려면 들키지나 말던가요. 아, 글쎄 통장에서 수시로 30만 원이 빠져나간 흔적이 또박또박 찍히지 않았겠어요. 이를 안 아들이 노발대발 한바탕 난리가 난 겁니다. 도대체 그 돈이 흘러들어간 상대가 누군가 하고요. 대찬 장남은 당장 신남 씨를 만났더랍니다. 만나보니 아버지와 서른 살 차이는 나 보인다더군요. 누가 보더라도 영감을 진정 사랑한다는 순수성에서는 멀어 보였겠지요. 그녀를 된통 다그쳤답니다. 한번만 더 내 아버지를 만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요. 으름장을 놓았겠지요. 신남 씨도 그 아들의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입니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우리 영감님. 순정을 다해 그녀를 찾는 영감님을 지켜보자니 저도 기가 찹니다. 그러고 보니 제 죄를 하나 더 추가해야겠군요. 아들에게 일러바친 잘못도 저질렀으니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남 씨는 영감님에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영감님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겠지요. 그러자 어느 날 갑자기, 야들야들하던 신남 씨로부터 연락이 단절되자 금단 형상이 생긴 건 영감님이었어요. 애간장이 탔습니다. 제발 신남 씨를 찾아달라고 만단애걸하십니다. 사랑놀이도 하고 용돈도 줄 텐데, 그러지 못하니 병이 날 지경이지요. 세상 하직할 날은 뚜벅뚜벅 다가오고, 보고 싶은 신남 씨는 소식이 묘연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일 후로 날이면 날마다 편지 몇 줄 써서는 봉투에 넣고 우표까지 붙여 저에게 당부하며 넘기는 겁니다. 꼭 우체통에 넣어달라고요. 주님, 이 편지를 정말 우체통에 넣으란 말인가요. 아니면 부치지도 않은 편지를 부쳤다고 언제까지 거짓말을 해야 할까요. 산타의 존재를 믿는 어린 마음에 산타의 부재를 들먹이며 상처를 주란 말인가요. 주님이 되레 절 좀 도와주세요.

그런데 주님, 영감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줄다리기가 들통난 후 끊긴 건 그녀와의 연락만이 아니었답니다. 홀로 기거하던 큰집마저 팔고 전세로 나앉게 된 겁니다.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않았다 뿐, 도우미 아줌마까지 들여 꼬박꼬박 생활비 대던 장남이 내린 결단이었지요. 수년간 여자에게 나간 액수로 볼 때 슬쩍 눈감아줄 시기는 물 건너간 일. 사업도 예전 같지 않은 데다 생활비가 뭉텅뭉텅 여자에게 건너간 사실에 화가 날대로 났지요. 그렇게 영감님 인생 말년의 애정 놀이는 그만 추태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요즘 'B.C'라는 말이 떠돈다 합니다. 캠퍼스 커플인 'C.C'처럼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커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지관 커플이라나요. 정년퇴직은 있어도 성에는 정년이 없다며 별 거리낌 없이 대시하고 어울리는 시대를 대변하는 용어로 보입니다. 관건은 경제적 독립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영감님이 아들 도움을 받지 않는 경제 독립체였다면 아들도 길길이 간섭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요는 현실이 노년의 성을 무시하게 한 거겠지요. 밥이 사랑을 앞선다는 게 슬프기는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인정해야 할 씁쓸한 세태인 걸요.

어쨌든 찝찝한 출근입니다. 저는 일을 해야 하고 분명한 건 영감님이 안됐다는 겁니다. 내막도 모르는 우리 영감님을 따습게 위로하는 말로 죗값을 치르면 안 될까요. 물론 신남 씨 향기를 백분의 일도 채우지 못하겠지만요.

나의 주님, 그래도 잘못했다고 보속 하라 하실 건가요.